두순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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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대순(大順) 2년([[891년]])에 46세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훗날 [[후량 (오대)|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에게 발탁되어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했으며 천우(天佑) 초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된지 5일 만에 사망. 금(琴)과 시에 능한 풍류인이었으나, 주전충의 권세를 얻고 교만하게 굴어서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전직, 또는 현직 관인으로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세어두었다가 죽이려 했다고 《구오대사(舊五代史)》에 전하며, 송대의 계유공(計有功)이 지은 《당시기사(唐詩紀事》에는 "권세를 믿고 관리를 업신여기니 사람들이 분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미처 그러지 못했다(恃势侮易缙绅搢紳,衆怒欲殺之而未及)"고 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병사했다고 적고 있다. 아들 헌영(憲英)이 있었다.
 
문집으로 《당풍집(唐風集)》 3권이 있으며, 고운(顧雲)이 그 서문을 지었다. 송대 엄우(嚴羽)는 《창랑시화(蒼浪詩話)》 · 시체(詩體)에서 그의 시체를 두순학체(杜苟鹤體)로 분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