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6번째 줄:
[[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신정 시新鄭市)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으로서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学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전(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당 무종|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