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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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진화론 관련 서적을 접한 그는 하늘의 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찰스 다윈]] 진화설과 [[에른스트 헤겔]]의 [[적자 생존|적자생존설]], [[우승열패론]] 등을 비롯한 [[사회진화론]]을 지긱히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것이 하늘의 도리, 순리로 해석하였다.<ref name="chans60"/> 다만 유길준은 우존열멸과 강승약패는 천도(하늘의 뜻)와 인사(인간의 만사)의 당연지사로 보면서도 경쟁에는 어느 정도 '공경하는 예'와 '사랑하는 덕'이 없으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다면서 경쟁의 도를 강조하였다.<ref name="chans60"/> 도덕과 권력의 양절에 대해 유길준은 인민을 위한 정치를 행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성(至誠)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전쟁 도발에는 비판적이었던 태도에서도 보인다.<ref name="chans60"/>
 
=== 단발령과 양복문명개화론 ===
그는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계몽 강연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 신라의 이두,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조선의 거북선, 고려청자, 조선백자, 최무선의 화포와 총통, 조선 초기의 신기전 등 기술적 혁신을 이룩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도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이두, 고려자기, 거북선, 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5백년간 문인들만을 우대하고, 기술자와 군인들은 천대하면서 이러한 훌륭한 기술과 성과들이 사장되었음을 역설했다. 그는 만약 후손들이 비실용적인 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이런 과학 기술 전통을 연구, 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세계의 영광이 조선에 돌려졌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과학, 기술의 천대가 조선을 멸망의 나락으로 이끌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근대적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을 미개한 상황으로 판단하였다. 유길준은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를 원시화, 미개화, 반개화, 문명화의 사단계로 구분하고 [[조선]]은 미개의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류 사회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문명화로 지목하였다. 그는 한국은 미개의 상태에서 반개 또는 문명으로 가야 되고, 문명화를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내정을 개혁하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표면적인 기술 문명 이전에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합리성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문명사회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개화의 등급을 보면 서구 열강이나 [[일본]] 역시 완벽한 개화를 이룩한 것이 아니고 고도문명화로 가는 단계에 있으므로 조선도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단발령과 양복 ====
그는 [[1894년]] [[갑오경장]] 이전부터 [[단발령]]을 주장했다. [[1894년]]에는 그해 초부터 [[고종]]을 상대로 [[단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길준이 단발을 확신한 이유로는 관리가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꾸준히 설득하여 [[1894년]] [[10월]] 고종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긴 한복과 긴 담뱃대를 불필요한 폐단, 폐습으로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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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에 대한 확신이 선 유길준은 직접 [[단발령]]을 공포하고 가위와 칼을 들고다니며 백성들의 상투를 잘랐다. 유길준은 갑오개혁 때 내부대신으로 단발령을 주도하며 손수 가위를 들고 세자의 머리를 깎아 큰 파문을 일으켰다.<ref name="bmoss"/>
 
==== 문명 개화와 주체적 관점 ====
=== 교육의 중요성 ===
유길준은 일본과 서양의 문명이 발전된 문명화된 상태였지만 완전히 문명화된 상태는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서구 사회도 아직 고도의 문명화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내다봤다. 그 근거로 그는 [[노예 제도]]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자각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되 우리 자신, 주체적인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제도와 사상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적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강연 활동과 자신의 각종 저술들을 통하여 서구의 제도와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소개하지만 그것은 [[조선]] 스스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화와 개혁을 하되 내 집 청소, 내 집을 가꾼다는 마음으로 주인된 마음으로 개혁을 해야 되지 빈객이나 노예의 처지, 수동적인 입장에서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개화, 개혁에 민중들의 참여가 적극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개화가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나 권력을 가진 정부에 의해서도 진행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한다고 보고, 일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식인이나 소수의 정부 권력자들보다 일반 국민들의 태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문명과 미개를 결정한다고 전망했다.
 
=== 교육, 계몽 중요론 ===
그는 일찍부터 교육이 중요하다고 봤다. 교육을 통해 무식과 무지를 깨닭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일관된 신념이었다.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국왕 고종에게 바친 상소문 언사소(言事疏)(1883)에서도 나타난다.<ref name="p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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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세속의 일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세속의 언어로 말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dodog326"/> 유길준의 그림은 정신의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가치중립적 서술과 실상 그대로의 묘사를 의미한다.<ref name="dodog326"/> 따라서 언어와 문장 역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수식을 늘어놓는 것을 진심을 숨기기 위한 재주, 희롱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 문명개화론 ===
그는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계몽 강연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 신라의 이두,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조선의 거북선, 고려청자, 조선백자, 최무선의 화포와 총통, 조선 초기의 신기전 등 기술적 혁신을 이룩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도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이두, 고려자기, 거북선, 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5백년간 문인들만을 우대하고, 기술자와 군인들은 천대하면서 이러한 훌륭한 기술과 성과들이 사장되었음을 역설했다. 그는 만약 후손들이 비실용적인 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이런 과학 기술 전통을 연구, 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세계의 영광이 조선에 돌려졌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과학, 기술의 천대가 조선을 멸망의 나락으로 이끌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근대적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을 미개한 상황으로 판단하였다. 유길준은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를 원시화, 미개화, 반개화, 문명화의 사단계로 구분하고 [[조선]]은 미개의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류 사회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문명화로 지목하였다. 그는 한국은 미개의 상태에서 반개 또는 문명으로 가야 되고, 문명화를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내정을 개혁하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표면적인 기술 문명 이전에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합리성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문명사회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개화의 등급을 보면 서구 열강이나 [[일본]] 역시 완벽한 개화를 이룩한 것이 아니고 고도문명화로 가는 단계에 있으므로 조선도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문명 개화와 주체적 관점 ====
유길준은 일본과 서양의 문명이 발전된 문명화된 상태였지만 완전히 문명화된 상태는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서구 사회도 아직 고도의 문명화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내다봤다. 그 근거로 그는 [[노예 제도]]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자각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되 우리 자신, 주체적인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제도와 사상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적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강연 활동과 자신의 각종 저술들을 통하여 서구의 제도와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소개하지만 그것은 [[조선]] 스스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화와 개혁을 하되 내 집 청소, 내 집을 가꾼다는 마음으로 주인된 마음으로 개혁을 해야 되지 빈객이나 노예의 처지, 수동적인 입장에서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개화, 개혁에 민중들의 참여가 적극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개화가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나 권력을 가진 정부에 의해서도 진행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한다고 보고, 일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식인이나 소수의 정부 권력자들보다 일반 국민들의 태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문명과 미개를 결정한다고 전망했다.
 
=== 외교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