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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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1856년]] [[음력 10월 24일]] ~ [[1914년]] [[9월 30일|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 유씨|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과거 제도|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제도|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조선 고종|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쿠데타|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을사조약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조선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 병합 조약|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 병합 조약|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병합 조약|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ref name="yud1">[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10654.html 계몽주의자, 군국주의자!:박노자] - 한겨레 21(제502호) 2004.04.01일자</ref>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ref name="만찬">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ref>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부|한성]]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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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은 [[1856년]] [[음력 10월 24일]] [[한성부]] 북촌 계동에서 진사 [[유진수]](兪鎭壽)와 [[이경직]](李耕稙)의 딸 정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회준(兪會濬)이 있고 동생인 [[유성준]](兪星濬)이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청송군|청송]][[부사]]를 지낸 [[유치홍]](兪致弘)이고, 당시 진사였던 아버지 [[유진수]]는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 당시의 [[사림파]] 학자인 [[유여주]]의 형 유여림의유여림(兪汝霖)의 후손으로, 유길준은 본래 [[조선 인조|인조]] 때의 [[영의정]] [[김자점]]의 외할아버지이자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12대손이다.<ref>김자점의 외사촌형제인 유철증의 10대손이었으나, 유길준의 조부 유치홍이 유홍의 사촌 유영의 8대손, 김자점의 외8촌인 유성증의 6대손 유돈환의 양자가 된다.</ref> 그러나 유홍의 9대손 유인환의 아들들 중 [[유치홍]]이 유홍의 삼촌인 숙민공 [[유강]]의 10대손 [[유돈환]]의 양자가 되면서 [[유강]]의 13대손이 되었다.<ref>유여림-유관(兪綰)-유홍(兪泓)-유대진(兪大進)-유철증(兪哲曾)-유 [[유강]]의 증손자이며방(兪 유길준의 10대조 [[유성중]]은 [[[강원도]][[관찰사]]로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양 증조부 [[유돈환]]의 할아버지이자 5대조인 저암 [[유한준]]枋)-유명관(兪命觀)-유석기(兪碩基)-유언룡(兪彦龍)-유한영(著菴兪漢英)-유건주(兪建柱)-유인환(兪仁煥) 저명한: 학자이자조부 서예가로, [[유한준]]은 [[이재]]의유치홍의 문인인 [[남유용]]의 문인으로생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했으며<ref>이이, 성혼유여림-김장생유강(兪絳)-김집유영(兪泳)-송시열유대의(兪大儀)-권상하유성증(兪省曾)-이재유황(兪榥)-남유용유명뢰(兪命賚)-유광기(兪廣基)-유언일(兪彦鎰)-유한준</ref>,(兪漢寯)-유회주(兪晦柱)-유돈환(兪敦煥) [[유한준]]은: 평생조부 [[송시열]]을유치홍의 흠모하여 [[송자대전]]을 늘 옆에 두었다고 한다.양부</ref>
 
[[유강]]의 증손자이며 유길준의 10대조 [[유성중]]은 [[[강원도]][[관찰사]]로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양 증조부 [[유돈환]]의 할아버지이자 5대조인 저암 [[유한준]](著菴兪漢雋)은 저명한 학자이자 서예가로, [[유한준]]은 [[이재]]의 문인인 [[남유용]]의 문인으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했으며<ref>이이, 성혼-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이재-남유용-유한준</ref>, [[유한준]]은 평생 [[송시열]]을 흠모하여 [[송자대전]]을 늘 옆에 두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인들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많은 [[한성부]] 사람들이 피난을 하자, 그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군]] 서부면 덕풍리로 피신, 은거했다. [[광주]]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만인 [[1869년]] 봄에 [[한성부|한성]]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 [[한학]] 성리학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