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must (토론 | 기여)
235번째 줄:
[[1928년]]부터 그는 [[중국]]과 만주 밖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1929년]] [[2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일제가 목을 죄어 오던 상하이와 만주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 개척을 시도했다. 안창호는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대규모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필리핀]] 이민국에 찾아갔다.<ref name="chosu1929">[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2/02/2006020270525.html 안창호, 만주韓人 필리핀 대이주 시도] 조선일보 2006.02.02</ref> [[중국]]과 [[만주]]의 마적단, [[일본]]의 경찰과 밀정, [[조선총독부]]의 경찰,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단의 출몰에서 만주 동포들을 구제할 방안으로 그는 [[만주]] 이주민들의 [[필리핀]] 이주를 위해 [[마닐라]] 등지의 적당한 지점을 물색하는 등 2년간 노력하였다.
 
그런데 “일본“[[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필리핀]] 외무부 당국이 내건 조건이었다. 당시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노동자 1명 월급이 쌀 한두 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할 때 너무 큰돈이었고, 일본 여권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ref name="chosu1929"/> 안창호는 [[이승만]]과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해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여권을 얻는 것은 어려웠고, 그가 처음에 중국인이나 외국인으로 가장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중국인이나 타국 사람이라고 말을 뒤집기도 어려웠다.
 
안창호는 [[마누엘 L. 케손|케손]](Quezon) [[필리핀]] 국회 상원의장 등 [[필리핀]] 정계 유력인사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결국 좌절하고 만다.<ref name="chosu1929"/>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부'를 설립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ref name="chosu1929"/>
 
==== 홍구공원 의거와 체포, 수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