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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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ref name="Naverpeople">{{웹 인용|url=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ie=utf8&query=안창호&os=165522|제목=네이버 인물검색 〈안창호〉|출판사=네이버|확인일자=2009-09-03}}</ref>)는 [[대한제국]]의 개혁,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으로 호는 도산(島山)이며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1881년)|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소화불량]]과 간경화를[[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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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너무 슬퍼하지 마오. 부인과 아이들 평안하오? 이렇게 어려운 곳을 오니 참 반갑소. 내 홑이불을 들고 내 다리와 몸을 보오. 이렇게 되곤 사는 법이 없소. 나는 본래 심장병이 있는 중 대전 감옥에서 위까지 상한 몸으로 이번 다시 종로서 유치장에서 삼복 염천 좁은 방에 10여 명이 가득 누웠으니, 내 몸은 견딜 수가 없었소. 의사의 말이 나는 지금 일곱 가지 병이 생겼다고 하오. 지금 이가 상하고 치아가 빠졌고, 폐간이 상하고, [[복막염]], [[피부염]] 모두 성한 곳이 없소. 그 종로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전신에 뼈만 남고 피가 말랐소. 나를 일으켜 안아 주시오.<ref name="gyul00"/>}}
 
그 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0세를 일기로 [[간경화]]와 [[소화불량]],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당시사망 당시 그는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ref name="고문치사1"/> 그의 장례식은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광수]], [[김성수 (1891년)|김성수]], [[여운형]], [[여운홍]], [[윤치영]], [[장택상]] 등이 참석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