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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ie Antoinette Execution1.jpg|thumb|right|230px|[[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
{{commons|guillotine}}
'''단두대'''(斷頭臺)또는 '''기요틴'''(Guillotine)은 [[프랑스혁명프랑스 혁명]] 당시 사용한 사형 기구이다. 이 기구는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다.
 
== 개발 및 도입 ==
 
1791년에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 (프랑스 혁명)|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세프 이그나스 기요탱]] 박사를 필두로 이 건에 관한 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만나이아” (혹은 만나자)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그리고 “헬리팩스 기벳” 등의 참수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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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 ==
 
단두대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기요탱 박사의 주장처럼 이 사형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과거의 사형 방법과 비교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논의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단두대의 신속함이 죄수의 고통을 더 지속시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기요틴 처형방법은 [[두개골]]에 충격을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이나 다른 과격한 사형 방법과는 달리 죄수의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
 
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
 
== 비고 ==
 
{{출처|이를 본떠서 하는 하위 팀끼리 시합하는 더비 경기인 '''단두대 매치'''(斷頭臺 -)가 이 이름을 본떠서 사용하기도 한다. 주로 [[야구]], [[축구]] 등 각종 [[프로페셔널 스포츠|프로 스포츠 경기]]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분류:사형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