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닛폰 파이레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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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우승 = 없음
| 이전 구단명 = <nowiki></nowiki>
* 니시니혼니시닛폰 파이레츠(1950년)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니시테쓰 클리퍼스]]에 흡수 합병(1951년)
| 이전 홈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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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의 헤이와다이 구장을 같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니시테쓰에 비해 센트럴 리그의 인기 있는 요미우리 전 등으로 관중 동원 등의 인기면에서는 위였으나 선수 영입이나 연봉 측면에서 서일본 신문이 프로 야구의 흥행에 익숙하지 못했다. 이것이 화가 되어 자가 부담으로 주최 경기를 실시하지 못했고 8월에는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도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니시테쓰와 같이 하위권에 침체되어 8구단 중 6위를 차지했다. 경영 악화로 서일본 신문이 인수를 제안할 것을 예상한 니시테쓰 측에서 클리퍼스의 팀 강화를 도모하는 인수 합병을 제의했고, 9월에 정식적으로 합병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1950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가 제창한 '센트럴 리그 6팀([[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카프]]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다이요 웨일스]]의 합병과 니시니혼의니시닛폰의 해체)' 주장에 반발해 요미우리의 총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해 팀 전력의 향상을 목표로 했으나 이 때 [[아오타 노보루]]가 미하라에게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한 것에서 사태가 악화되어 리그에서 고립되었다.
 
[[1951년]] 개막 전에 "요미우리의 횡포를 견딜 수 없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후 전격적으로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쓰 클리퍼스와 합병해 '''니시테쓰 라이온스'''(西鉄ライオンズ)가 되었다. 하지만 합병 당시 요미우리가 "니시니혼니시닛폰 선수의 보유권은 센트럴 리그에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당시 [[일본 프로페셔널 야구 협약|야구 협약]]은 발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나미무라 유코]]와 [[히라이 사부로]]가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히비노 다케시]]는 임시 구속되었으나 후에 니시테쓰로 복귀).
 
한편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후신에 해당하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는 구단 역사상 니시니혼니시닛폰 파이레츠는 방계 취급을 하고 있으며, 결성년도 및 기타 기록은 일절 포함하지 않고 있다.
 
또한 리그가 분리되고 나서 가장 먼저 일본 프로 야구 계를 떠난 일본 프로 야구 구단이며 1시즌 밖에 활동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소멸한 9구단 중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