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일본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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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리그는 같은 리그에 참여를 약속했던 마이니치·니시테쓰 클리퍼스(현재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긴테쓰 펄스(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현재는 소멸)에 기존의 한큐·난카이·도큐·다이에이의 7구단으로 정해졌다. 한편 센트럴 리그는 기존의 요미우리·한신·주니치·쇼치쿠 로빈스의 4개 구단 뿐이었다. 리그 분열 이전에 새로운 구단의 가입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리그가 분열 이후 구단 수가 극단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분열 이전의 8개 구단 정도까지 늘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새로운 팬 개척을 위해 주고쿠·규슈 양 지방 구단의 창설을 요구했다. [[시모노세키 시]]의 다이요 웨일스(현재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 [[히로시마 시]]의 히로시마 카프(현재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2개 구단이 센트럴 리그에 가입해 주고쿠는 센트럴 리그가 선행했지만 규슈 지방은 니시테쓰가 후쿠오카를 연고로 했기 때문에 퍼시픽 리그가 선행되었다.
규슈 지방의 상대를 강하게 하고자 했던 요미우리는 니시테쓰가 [[서일본 철도]]와 [[서일본 신문]]의 공동 출자인 것에 주목, 서일본 신문을 분리해 센트럴 리그에 끌어들여
한편 마이니치는 한신의 감독으로 알력이 끊이지 않았던 [[와카바야시 다다시]]를 선수 겸임 감독으로 초빙해 [[벳토 가오루]], [[도이가키 다케시]], [[고 쇼세이]], 와카바야시를 존경하거나 구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한신의 주력 선수들을 차례대로 끌어왔다. 또한 요미우리는 한큐와 도큐의 선수들을 끌어내 니시테쓰와 분리되어 전력이 약했던
== 여파 ==
연맹 붕괴의 여파는 1950년 시즌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아카미네의 쇼치쿠 이적 사건은 퍼시픽 리그에서 인정하지 않아 공식전 시작 이후 고즈루 등의 신분은 잠시 공중에 뜬 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개최가 검토되었던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올스타전]]은 취소되었고, 1950년 처음으로 열린 [[1950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의 상대였던 마이니치와 쇼치쿠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한술 더 뜬 것은 1950년 시즌 종료 후 정해진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쓰와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벳쇼 빼내기 사건]], 마이니치 대량 빼내기 사건, [[아카미네 선풍]]으로 대표되는 구단 간의 선수 빼오기가 과열화되자 이를 문제삼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통일된 계약서를 문서화해 '''[[일본 프로페셔널 야구 협약|야구 협약]]'''을 발표했다. 구단 간 선수 보유권이 만들어졌고 선수가 자의로 팀을 퇴단하고 다른 구단과 계약을 맺을 때 이전 구단의 양해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렇게 선수 빼오기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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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리그 전환 후 올스타전 및 [[일본 선수권 시리즈|일본 시리즈]] 등의 개최로 일본 프로 야구의 인기가 높아졌다. 또한 주고쿠·규슈 지방에 새로운 구단이 창설했기 때문에 이러한 지역에서 일본 프로 야구 팬이 급증한 것도 재편의 큰 성과이다. 한편, 점진적인 양대 리그로의 발전을 생각했던 쇼리키의 구상과는 달리 급속하게 재편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두 리그 분열의 경위와 그 선수들을 빼오는 것에 의해 두 리그 사이에 큰 원한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양대 리그의 관계는 공존 관계라기 보다는 경쟁 관계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양대 리그로 전환했을 때에는 애초에 인기 구단인 요미우리와 한신이 센트럴 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것에 대해, 퍼시픽 리그에서는 난카이·니시테쓰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따라서 양대 리그의 관객 동원 수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고, 퍼시픽 리그의 관객 동원 수가 센트럴 리그보다 약간 적은 정도였다. 게다가 1951년에 센트럴 리그의
그런데 다카하시는 팬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1957년]]에 다이에이에 흡수 합병되어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되었고, 다이에이가 그 해 시즌 종료 후 마이니치에 흡수 합병되어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를 거쳐 현재는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어 1리그 6구단 씩 2리그 12구단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양 리그의 관객 동원 수의 차이가 점차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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