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4.63.6.239(토론)의 11328526판 편집을 되돌림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공손 찬'''(公孫 瓚, ? ~ [[199년]] [[음력 3월|3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로, [[자 (이름)|자]]는 '''백규'''(伯圭)<ref name=a>《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ref><ref>《[[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백규'''(伯珪)라고 하나, 圭로 이름짓고 때에 따라서 珪를 혼용하였던 가차자 관계인 것으로 간주된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따르면'규찬(圭瓚)을 하사한 후에야 창주(鬯酒)를 빚는다(賜圭瓚然後이라)'란 하였고구절이 규찬은보이는데, '규찬'은 술잔의 일종으로 손잡이가 옥으로 장식 된장식된 것이라 하였다. 자의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일치한다.</ref>이며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이다. 수많은 전공을 세워 백마장군이라는 명성을 쌓으며 북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생애==
용모가 수려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노식]](盧植)과 [[유관 (후한)|유관]](劉寬)의 밑에서<ref name=a>《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ref> 학문을 익혔다. 공손찬은 처음에 [[요서]] 군현 문하의 서좌(書佐) 직위에 있었다. 그 곳의 태수가 공손찬이 변설에 능하고 지혜가 있는 것을 보고 탁군의 [[노식]]의 문하에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이후 [[효렴]](孝廉)에 천거됐고, [[요동]]속국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에 임명됐다. 그 곳에서 [[선비족|선비]](鮮卑) 기마병들과 맞서 싸웠고, 이후 탁령(涿令)으로 영전되었다.
 
관청에서 나와 유명한 마융의 수제자였던 탁의 노자간을 사사하였다. 노식이 직접 편찬한 교과서 <<삼례해고>>를 익혔다. 그러나 시세가 역변하여 장인 요서태수가 징좌되었다. 유배지는 저승이라 불리는 남쪽 끝의 일남이었다. 공손찬은 곧바로 수레꾼을 자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