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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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 사단장의 작전구상이었으나 이는 너무 성급한 반격이었다. 이 무렵 제 3연대는 이미 분산되었는데<ref>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 그는 [[이형근]] 준장의 친동생이다.)는 25일 포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패전하여 흩어져 버린 것이다. </ref> 제 2·7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구상을 함으로써 제 2사단의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작전이 되고 말았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더구나 축석령에 가면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때에 동연대는 이미 이곳을 철수하여 금오리 남쪽에 집결중이었으니, 이 공격은 벌써 계획수립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ref>
사단 참모장 [[최창언]]
제2대대장은 병력의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분산되어 한강 남쪽의 낙오자 수집소에 집결하게 되었다. 08시에 이르러, 제5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정도(李貞道) 소령)가 증원부대로 본자일(本自逸)쪽으로 달려왔다. 이
이렇게 제2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에도 급급한 지경이 되자 [[문용채]]가 이끄는 제16연대(25일 [[청주]]를 떠나 26일 04:00에야 창동에 도착하였다.)를 상금오동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국군은 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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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와중에서 제7사단과 제2사단 전술지휘소는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전술지휘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 백석천, 내촌 일대의 지연전 ===
6월 26일 오전에 창동으로 열차이동한 [[김병휘]]가 이끄는 제25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의정부 남쪽 교외의 [[백석천]]에 제 2·3의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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