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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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 사단장의 작전구상이었으나 이는 너무 성급한 반격이었다. 이 무렵 제 3연대는 이미 분산되었는데<ref>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 그는 [[이형근]] 준장의 친동생이다.)는 25일 포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패전하여 흩어져 버린 것이다. </ref> 제 2·7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구상을 함으로써 제 2사단의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작전이 되고 말았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더구나 축석령에 가면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때에 동연대는 이미 이곳을 철수하여 금오리 남쪽에 집결중이었으니, 이 공격은 벌써 계획수립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ref>
 
사단 참모장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는 제 2대대를제2대대를 선발대로 먼저 축석령으로 진출시켰으나 제3연대는 그곳에 없었다. 이윽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전차의 굉음이 들리더니 북한군 기갑부대가 [[차갑준]]이 이끄는 제2대대 진전에 나타났다. <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8쪽. <!-- 그러나 사전정찰에 의한 치밀한 계획을 마련치 못한 대대는 아무런 적정을 모르고 一路 축석령을 오르던 바, 그 선두가 본자원[현 자원동] 북쪽 300m까지 진출하였을 때 적의 전차가 먼저 이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ref> 이에 제5연대 제2대대 장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교전한 지 10분도 못 되어 탄약이 떨어지고 투지마저 꺾여 분산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2대대장은 병력의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분산되어 한강 남쪽의 낙오자 수집소에 집결하게 되었다. 08시에 이르러, 제5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정도(李貞道) 소령)가 증원부대로 본자일(本自逸)쪽으로 달려왔다. 이 때문에대대 또한 제2대대와 마찬가지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후속부대인채로 [[이정도자일동]](自逸洞)에 이끄는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는 통보만을 받고 진출하다가 여기에서 전차대와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제1대대는 고갯마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퇴계원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69쪽. <!-- 어느덧 08.00에 이르러, 李貞道 소령이 이끄는 제5연대의 제1대대가 증원코자 본자일(本自逸)쪽으로 달려왔다. ... 이 대대도 또한 제2대대와 마찬가지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채로 『自逸洞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는 통보만을 받고 진출하다가 여기에서 전차대와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ref>
 
이렇게 제2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에도 급급한 지경이 되자 [[문용채]]가 이끄는 제16연대(25일 [[청주]]를 떠나 26일 04:00에야 창동에 도착하였다.)를 상금오동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국군은 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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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와중에서 제7사단과 제2사단 전술지휘소는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전술지휘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 백석천, 내촌 일대의 지연전 ===
6월 26일 오전에 창동으로 열차이동한 [[김병휘]]가 이끄는 제25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의정부 남쪽 교외의 [[백석천]]에 제 2·3의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