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커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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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크 전투는 미래의 승리를 이끌어낸 씨앗이 되었다는 점을 포함해 잉글랜드의 완벽한 승리였다. 거만하고 훈련 안 된 기사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하나의 직업적인 사업이 되었으며, 막무가내 식 돌격은 이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용감함은 조직력과 훈련에 적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투에서 효과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능력이 결정적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폴커크에서 성공했으나 같은 상황에 처한 [[에드워드 2세]]는 [[배넉번 전투|배넉번]](Bannockburn)에서 이에 대응하는데 실패하고, 격파 당했다.
 
폴커크는 [[던바]](Dunbar)전투에 비해 결정적인 전투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월리스의 신뢰도는 낮아졌지만, 스코틀랜드 왕국은 월리스의 초토화전술로 인해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왕의 군세는 배고픔과 질병으로 많이 약화되었고 더 이상 전역을 진행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왕은 [[칼라일 (컴브리아 주)|칼라일]](Carlisle)로의 퇴각을 명했고, 이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음원정을 준비하려 했으나, [[더럼]]에서 파견된 베크의 분견대의 대부분을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남은 영토들을 차지할 수 있다는 미끼를 걸어 이탈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이는 소란스런 말다툼만을 야기했을 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비록 그 해 말까지 국경선 근처에 있었지만, 그의 군대 대다수를 잃지 않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남쪽으로 돌아간 후에 그의 봉신들의 불성실함이 폴커크의 열매를 그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여겼다.
 
폴커크에서 월리스가 겪은 패배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소위 말하는 "민중적" 국면이 종료되고, 독립전쟁의 주도권이 전통적인 귀족들의 손에 넘어간 것을 뜻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독립을 위한 힘을 가지지 못한 위대한 영웅은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을 사직하고, 해외를 여행하면서 프랑스의 왕과 교황청의 지원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월리스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1305년 잡혀서 처형당할 때까지 약 7년 동안 역사의 전면 밖에서 도망쳐 다녔다.
 
== 참조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