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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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본관은 [[청주시|청주]], 자는 방로, 시호는 현무로 [[전남]] [[강진군]] [[작천면]] 박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77년]] 알성무과에 급제했는데 [[조선 선조|선조]]가 그의 무공을 높이 평가해 유학자 [[율곡 이이]]에게 김억추의 용맹을 칭송하는 시를 짓게 했다고 한다. 무이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 판관과 사복시 판관, [[진산]]과 [[순창]] 등의 현감을 지냈다. [[순창]] 군수로 재임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로 임명되어 [[평안도]]에 도착해 [[대동강]]을 지켰다. 그러나 [[평양 전투|제1차 평양 전투]]에서 패배해 관직을 빼앗겼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가 되고 [[진주]] 목사와 고령진첨절제사를 지냈다.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을 따라 [[어란포 해전]]과 [[명량 해전]]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수군 절도사에절도사의 재목이 못되고 억지로 임명되었으며 해전 중에는 도망가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밀양]] 부사를 거쳐 [[1608년]] [[종2품]]에 올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제주]] 목사도 지냈다. 그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박산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71세로 죽었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