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섭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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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섭'''(李晶燮, <small>일본식 이름:</small> 宮本晶燮('''미야모토 아키쇼'''), [[1899년]]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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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3년]] [[11월 6일]] [[시중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8년]] 2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가진 회견에서 [[일본 제국]]의 [[내선일체]]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민중단일당 건설을 제안했는데 그가 구상한 민중단일당은 군(軍), 관(官), 민(民)의 합작으로 설립되어 이들을 일체로 만들고 조선을 총지배하는 단일 조직이었다. 이 회견은 1938년 5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총독회견기(總督會見記)〉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1938년 5월 2일 [[경성방송국|경성중앙방송국]] 방송부 제2방송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1939년]] 《재만조선인통신》에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논설을 기고했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삼국 동맹 조약]] 체결과 [[태평양 전쟁]], [[
광복 이후인 [[1945년]] [[9월 15일]]부터 [[1948년]] [[10월 7일]] 대한민국 정부의 방송 국영화 조치로 해체될 때까지 조선방송협회([[한국방송공사]]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 때인 [[1950년]] [[7월 17일]] 납북되었다
== 주요 기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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