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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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참고|위화도 회군}}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에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怨聲)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의 전횡시대보다 더 컸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영]](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만8천8백여명3만8,800여명 등 5만여 병력(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에게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봉산군|봉산]]에 가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미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우왕은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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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억누르고 출병을 강행하였다. [[1388년]] 음력 4월 18일,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3만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1만1,634명, 말 2만 1682필을2만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었다.
 
[[1388년]] [[음력 5월 22일]],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全軍)을 회군시켰다.([[위화도 회군]])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성|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여 반란군에 대항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란군은 [[최영]]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개성|개경]]에서 참형되었으며, [[우왕]]도 폐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