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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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觀察使''')는, 중국 당대(唐代)에서 처음비롯하여 생겨나,훗날 한국의 [[조선]](朝鮮), 나아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초기 일본에도 설치되었던 지방행정 감찰을 맡은 관직이다.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한다.
 
조선 왕조에서 관찰사는 국왕 직속의 관직이었으며, 당(唐)・일본에서는 모두 [[율령]]에 규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영외관(令外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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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
[[파일:Patrol of Gwanchalsa.JPG|thumb|관찰사 순력 행차 모형]]
한국에서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서 [[전라도]] [[고부군]]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왕건|태조]](太祖) 19년([[936년]])에 영주관찰사(瀛州觀察使)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 백관지에서 「단련사(團練使) · 도단련사(都團練使) · 자사 · 관찰사는 [[고려 성종|성종]](成宗)이 주부(州府)의 직(職)으로 삼았던 것인데 목종(穆宗)이 파하였다.」고 하여 고려 초기에 잠시 존재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임명된 인물이 확실히 보이는 것은 같은 책 세가에서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298년]]) 5월에 왕자들을 여러 군(軍)의 관찰사로 임명한 것이 최초이며, [[공양왕]](恭讓王) 2년([[1390년]])에 각 도마다 관찰사와 경력사(經歷司)를 보냈다가 4년([[1392년]])에 관찰사를 파하고 다시 [[안렴사]](按廉使)를 두었다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기에 처음 둔 사례가 있으나,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것은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였다. 감사(監司)·방백(方伯)·도백(道伯) 등으로 불렸는데 왕의 직계권을 부여받아 왕과 지방을 잇는 유일하면서도 확고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기에 처음 둔 사례가 있으나,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것은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였다. 감사(監司)·방백(方伯)·도백(道伯) 등으로 불렸는데 왕의 직계권을 부여받아 왕과 지방을 잇는 유일하면서도 확고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품계는 종2품 문관직으로 각 도마다 1명씩 설치되어, 당의 제도와 같이 병마절도사 · 수군절도사 등 무관직을 거의 겸했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에 따라 행하였지만, 관할 도에 대해서는 행정·사법·군사·치안 등 포괄적인 책임권을 가지고 [[사법권]] · 징세권 등을 행사하여 지방 행정상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 관원으로는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 일반 민정은 감영에 속한 6방의 향리가 담당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