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전승과 판본: 내부 연결된 항목의 한자어 병기 삭제
잔글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효경은 [[진나라|진]](秦)의 [[분서갱유|분서]](焚書) 때 하간(河間) 사람 안지(顔芝)가 보관해 두었던 것을 [[한나라|한]](漢)나라 초기에 [[협서율]](挾書律)이 해제되면서 안지의 아들 안정(顔貞)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한대의 서체인 [[예서체]](隸書體)로 된 것이었으므로 '금문효경(今文孝經)'이라 부른다. 금문효경은 [[전한]](前漢)의 장손씨(長孫氏), 강옹(江翁), 익봉(翼奉), 후창(后蒼), 장우(張禹) 등에 의하여 전해졌다. 그 뒤 [[후한]] 말의 학자 [[정현 (후한)|정현]](鄭玄)이 주석한 효경 1권이 있는데, 이것을 정주본(鄭注本)이라고 한다. 정주본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현이 주석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서 [[한 무제]](武帝) 때 노(魯)의 [[유여 (사람)|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헐면서 벽 속에서 《[[상서]]》, 《[[논어]]》 등과 함께 《효경》이 나왔는데, 이것은 고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고문효경(古文孝經)'이라고 한다. 고문효경은 한 무제 때의 사람 [[공안국]](孔安國)이 주석을 썼는데, 이것을 공안국전(孔安國傳) 또는 공씨전(孔氏傳)이라고 한다. 따라서 효경에는 정주본인 금문효경과 공씨전인 고문효경의 두 가지 종류가 있게 되었다.
 
이상의 두 종류의 효경이 [[양나라|양]](梁)나라 때까지 함께 전해졌었는데, 공안국전은 양나라 말엽에 있었던 난리 때 망실되어 진(陳), 주(周), 제(齊)에는 금문정주(今文鄭注)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 뒤 [[수나라|수]](隋)나라 때에 이르러 비서감(秘書監) 왕소(王邵)가 공씨전을 경사(京師, 수도)에서 얻어 하간사람 [[유현]](劉炫)에게 보냈고, 유현이 여기에 소(疏)를 써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옛 공씨전이 아니고 유현 자신이 쓴 위서(僞書)라고 의심하였다. 한편, 공씨전은 위(魏)의 [[왕숙]](王肅)이 정주본에 반대하여 쓴 위서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