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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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 1993년~ 1998년)는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 '''문민정부'''(文民政府)는 [[김영삼]] 정부의 별칭이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908235 역대 정권의 아이콘에 대한 단상], 《대전일보》, 2010년 9월 16일.</ref> [[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고,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일명 "[[조문파동]]")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임기 말, 아들 [[김현철 (1959년)|김현철]] 비리와 [[IMF 구제 금융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 정치 ==
=== 취임과 사정 작업 ===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170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함께 신한국으로] 1993.2.25 mbc뉴스데스크</ref>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의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불리게 되었다. [[삼당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시켰다. 김영삼은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칼"을 들어 정치·경제·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일시에 쇄신하고자 했다.<ref name="한415">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6) 415페이지</ref>
 
[[2월 27일]],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고 공개한 본인의 재산을 보면 김영삼과 부인 손명순 여사는 상도동 자택과 거제군 장목리 전답, 승용차, 헬스클럽 회원권, 선박 등 모두 6억 8천 601만 3410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241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재산 공개. 국무위원 재산공개 권유] 1993.2.27 mbc뉴스데스크</ref> 그리고 김영삼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했고, 삼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연이어 재산을 공개하게 되었다.<ref name="vs1">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4:미완성의 민주화》 (한길사 | 2006) 409페이지</ref>
 
[[3월 13일]], 김영삼은 [[일본군 위안부|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752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종군위안부 문제 정부예산으로 보상] mbc뉴스데스크 1993-03-13</ref> 이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5월 13일]] 5·13특별 담화에서 그는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그 뒤 반공주의 극우 세력의 반발이 심화되자 [[5.18]]과 [[12.12]] 군사반란 및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문제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라고 발언하여 결말을 뒤로 미루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광주 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문 발표] 1993.5.13 mbc뉴스데스크</ref>
 
1995년 [[6월 3일]]에는 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가 모여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을 열었으며 시민, 학생 등 1만여명,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emos.or.kr/ilji/viewbody.html?code=agenda&page=3&number=4798&keyfield=event&key=%B1%E8%BF%B5%BB%EF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95-06-03</ref> [[6월 22일]]에는 경제부총리 [[이경식 (1933년)|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7월]]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8월 12일]]에는 긴급명령을 발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 집권 초기 및 중기 ===
문민정부는 [[1993년]] 취임 직후부터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 관련 특별담화 발표와 개혁과 부패 일신을 외치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제거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그해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그 밖에 [[공직자윤리법]]도 도입하여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6월 29일]] 육군 [[상록수 부대]]를 소말리아 평화유지군(PKO)으로 파견하였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49878 전쟁과 독재에 울고 혁명·올림픽에 웃다]</ref>
 
1993년 [[2월]] 취임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강제 해직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들 중 일부를 사면, 복직시키고, [[전교조]]의 활동을 허용해주었다. [[6월 13일]]에는 “[[5·16 군사 정변]]은 쿠테타”라는 발언을 했다. 5·16 군사 정변을 쿠테타로 정의한 뒤,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실린 기술을 쿠테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 출신 및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듬해 [[1994년]]에는 [[김문수 (정치인)|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시켰다. 이후 군사정권과 관련 없는 [[홍준표 (1954년)|홍준표]]·[[오세훈]] 등의 신진 관료출신과 법관출신들도 등용하였고, 군사정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박노해]]·[[김남주 (시인)|김남주]] 등 언론인과 문인들을 대대적으로 감형,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함에 따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전기를 이룩했다.<ref>한국인권재단, 《인권평론 (2007 6월호)》 (한길사, 2007) 74페이지</ref>
 
[[1994년]] 3월 15일 당시 여야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정치개혁법을 공포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2379026 YS "3·15의거,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ref> 1994년 말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여 이듬해인 [[1995년]] [[6월 27일]]에 5.16 군사정변 이후 처음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7 쿠데타]]에 대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반란죄,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이들에 대한 국민적 처벌 요구를 애써 외면했다.
 
===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
{{참고|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같은해 [[10월 19일]] [[민주당 (대한민국, 1991)|통합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이 발생하여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1995년 [[12월 12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가능하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ref>95헌마221</ref> 이에 정부는 고심 끝에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1995년 11월 말 전격적으로 구속 수감하였다. 1995년 [[12월 21일]]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 회복을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다.<ref>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17 김영삼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127004 <`10년째 미완' 노태우 비자금 사건> ]</ref>
[[파일:Kim Young Sam 1996.png|200px|thumb|대통령 재임 시절의 김영삼(1996년)]]
 
[[1995년]] [[8월 2일]], [[행정안전부|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전두환]]·[[노태우]]의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의 혐의에 대해 반란죄,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된 이후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하였다.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1,1,list1,24.html 김영삼대통령의 5.18 특별법 제정 지시 의미] 1995.11.24 mbc뉴스데스크</ref>
 
헌법재판소에 검찰의 5.18 사건 불기소 처분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1,1,list1,16.html 노태우 씨 구속 집행 표정] 1995.11.16 mbc뉴스데스크</ref> 12월 3일에는 전두환이 구속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3.html 전두환 구속 수감 첫날] 1995.12.3 mbc 뉴스데스크</ref> 12월 19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19.html 여야 3당,5.18 특별법 합의] 1995.12.19 mbc뉴스데스크</ref>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8명을 구속 기소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1,1,list1,23.html] 1996.1.23 mbc뉴스데스크</ref> 김영삼은 군정과의 관계를 끊고자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2,1,list1,6.html] 1996.2.6 mbc뉴스데스크</ref>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6년 8월, 각각 사형(전두환)과 징역 22년형(노태우)을 선고받았으나<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8,1,list1,26.html] 1996.8.26 mbc뉴스데스크</ref> 96년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전두환)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16.html] 1996.12.13 mbc뉴스데스크</ref> 그 이듬해인 1997년 12월 20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옥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70066&categoryId=200000317</ref><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20.html]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사면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당시 김영삼의 청와대는 김대중 당선자(12월 18일 대통령당선)에게 방문하여 제안하여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켰다고 전해졌다.<ref>[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6187.html 국민 대화합 첫 단추]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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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권 말기 ===
1997년 1월 7일,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개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성명으로 노동계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74442_6187.html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 강조] 1997.1.7 mbc뉴스데스크</ref> 이후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반대 총파업이 벌어졌다. 1월 23일에는 [[한보철강]]이 부도로 도산했다. 이때 한보회장 정태수는 구속되었고 한보사태 수사중 김영삼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4,1,list1,25.html] 1997.4.25 mbc뉴스데스크</ref>
 
[[1997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의 지속적인 악화와 정권의 인기에 연연한 독단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 등이 맞물려 점차 국민의 지지는 시들해졌다. 임기말에는 노태우, 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면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8130151 특별사면]</ref>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2월 18일에는 [[국민회의]]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19.html] 1997.12.19 mb뉴스데스크</ref>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 안전 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3월 18일]], 검찰 소환을 받은 권영해는 조사중에 자해하는 소동을 빚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978163_6202.html 권영해 전 안기부장 성경에 숨긴 칼로 자해] 1998.3.18 mbc뉴스데스크</ref> 권영해 부장 후임으로 1998년 3월 취임한 [[이종찬 (1936년)|이종찬]] 안기부장은 안기부에 대한 사정 작업과 정치 중립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 국가 정보원으로 명칭도 변경하였으나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불법 전화 도청 등의 행태는 계속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20401_6307.html 국가정보원, 김대중 정부까지 해 왔다고 밝혀] 2005.8.6 mbc뉴스데스크</ref>
 
[[1997년]] [[12월 20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은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난 지 8개월여 만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두 사람에 대한 사면을 합의, 발표했고 이로써 비자금 사건은 종결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127004 <`10년째 미완' 노태우 비자금 사건> ]</ref>
 
=== 기타 ===
취임 직후부터 김영삼은 정통성 확립에 중점을 기울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보수인사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를 건너뛰었다는 반발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1993년 [[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 추진했다. [[8월 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고, [[1993년]] 말부터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총독부]] 철거 지시를 내렸다.
 
== 외교 ==
문민정부는 이른바 '신외교'를 표방하였다. [[1996년]] 12월 프랑스 파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0,1,list1,11.html] 1996.10.11 mbc뉴스데스크</ref>
 
=== 남북 관계 ===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여파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 확산시켜 개혁·개방화 체제로 유도하는 것을 그 정책목표로 삼았다.<ref name="한416"/> 김영삼의 대북정책은 남·북간의 '공조·공영'에 있다고 천명하고 있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역대 전임 정권이 취해왔던 '대북 우위를 견지하는 흡수통일'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ref name="한416"/> {{언제|날짜=|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와 함께 화해분위기가 지속되어}} [[1993년]] 취임 초 김영삼은 북조선의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어내,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하려 하였다. 그러나 [[1994년]] [[7월]]에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993년]] 취임 초부터 북측과 연락, {{언제|날짜=|김영삼 정부는 [[남북한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9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여 김영삼 정부는 갑자기 1차 북핵위기를 맞았고, 이후 대북정책이 '냉, 온탕'을 왔다갔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 name="전직 대통령">{{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432696 |제목=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출판사= 연합뉴스 |작성일자 = 2006-10-10}}</ref> 1994년 6월에 일어난 1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는 등 파국으로 치달랐다. 김영삼 정부도 공습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ref name="전직 대통령"/> 이를 저지하였다. 위기는 대북 특사 [[지미 카터]]와 김일성이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 살상 무기#제1차 북핵 위기|제1차 북핵 위기]])
 
지미 카터의 방북시, 김일성은 지미 카터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갑작스러운 북미관계 개선으로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15_6142.html 정부,국면 전환 주시] 1994.6.17 mbc뉴스데스크</ref> 6월 18일, 북측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무조건 수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88_6142.html 김영삼대통령,남북정상회담 제의 사실 전달받아 즉각 수락] 1994.6.18 mbc뉴스데스크</ref> 불과 하루만에 북측의 놀라운 태도변화로 정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국제적인 해빙무드를 거스를 수 없어 북측의 정상회담제의를 무조건 수락했다. 김영삼은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7월 2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 절차도 완전히 마무리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2.html] 1994.7.2 mbc뉴스데스크</ref> 이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대한민국]]의 통일은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7월 9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9.html] 1994.7.9 mbc뉴스데스크</ref>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측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ref name="오마이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4823 딱 네 글자에 3조원 쓴 YS... MB는?] - 오마이뉴스</ref>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기 시작했다.<ref name="오마이1"/>
이 당시 정부는 대외적인 여론을 주시하며 국내의 김일성 참배여론을 원천봉쇄했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조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3566_6142.html 전남대 학생회관, 김일성 분향소 발견] 1994.7.15 mbc뉴스데스크</ref> 구 군사정권 관계자들이 [[김일성]] 빈소 조문 사건을 문제삼아 재기의 조짐이 보이자, 김영삼 정부는 일부 주동 대학생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토록 하였다.
 
[[1995년]] [[6월 25일]] 정부는 북측에 대한 식량 지원(쌀 15만톤 규모)을 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06,1,list1,25.html] 1995.6.25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여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18일,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여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9,1,list1,18.html] 1996.9.18 mbc뉴스데스크</ref>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2,1,list1,12.html] 1997.2.12 mbc뉴스데스크</ref> 7월 10일, 망명한 황장엽은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북측의 전쟁준비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7,1,list1,10.html] 1997.7.10 mbc뉴스데스크</ref> 같은시기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이한영씨가 분당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2,1,list1,16.html] 1997.2.16 mbc뉴스데스크</ref>
 
=== 한미 관계 ===
{{참고|한미 관계#김영삼 정부}}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측과 미국이 [[대한민국]]을 배제한 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측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더불어 [[제네바 합의]] 체결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나타났다.<ref>{{뉴스 인용 |url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제목=MB-오바마 ‘궁합’은? |출판사= [[문화일보]] | 작성일자 = 2008-11-7 }}</ref> 1996년 10월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는데(→[[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YS-클린턴][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ref>
 
=== 한일 관계 ===
[[1995년]] 10월, [[일본]]의 [[일본 총무청|총무청]] 장관인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도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발언했고 이후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발언하는 등 일본의 정계에서 식민지 지배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끊임없이 나오자, 이에 [[김영삼]]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8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8&officeId=00020&pageNo=7&printNo=23029&publishType=00010 |제목=日 불쾌감 표시 |출판사= [[동아일보]] | 작성일자 = 1995-11-18 |쪽=7}}</ref>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한·일 해군력의 현실태를 보고 받고는 이지스함 6척 보유 정책을 추진한다.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순탄치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와중에 97년 겨울,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0677 냉탕·온탕 오가는 한일관계 'MB式' 해법은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634841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ref>
 
=== 한-유럽 관계 ===
1993년 9월 14일 ~ 16일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 회담을 갖고,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 측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단, 그 구체적인 시기와 절차는 실무협의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상징으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 1권을 9월 15일 한국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고속철도 핵심기술 이전 및 차세대 고속전철 개발 협조를 논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제목=한국古書2점 오늘 반환 |출판사= [[경향신문]] | 작성일자 = 1993-9-15 |쪽=1}}</ref><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700099101015&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3-09-17&officeId=00009&pageNo=1&printNo=8535&publishType=00010 |제목=미테랑 離韓 |출판사= [[매일경제신문]] | 작성일자 = 1993-9-17 |쪽=1}}</ref> 1993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한 [[슬로바키아]], [[리히텐슈타인]]과 수교하였다. 1995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 기타 ===
[[라오스]], [[키프로스]](각 1995년), [[캄보디아]](1996년)와 수교하였다. 1994년 11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이때의 양국 정상회담(김영삼-[[피델 라모스]])에서 필리핀 통신사업과 대형 건설사업에 한국 기업이 적극 참여하도록 배려한다는 약속을 하는 등 기존의 대한 우호정책을 재확인하였다.<ref name="양승윤"> 양승윤, 《필리핀》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2003)</ref> {{Rp|367}}
 
== 경제 ==
취임후 '신경제 100일 계획'을 세워 경제정책을 펼쳤다. 경제제도의 개혁보다는 경기 활성화에 역점을 둔 신경제 계획은 금리 인하, 재정 조기 집행, 기업 투자 유인 등이 주내용이었다. 이어 ‘[[신경제 5개년계획]]’도 발표했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787820 경기 부양]</ref> 중소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경쟁체제 도입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 현상이 발생했다.<ref>[http://www.asiae.co.kr/uhtml/read.jsp?idxno=380892&section=S1N5&section2=S2N107 中企,정권따라 희비]</ref>
 
1993년 8월 12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이다. 은행의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는 이 조치로 금융시장이 위축되고 소규모 사업자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93년 [[11월 1일]]에는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ref name="한416">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6) 416페이지</ref>
 
1993년 12월 정부는 수년 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지었다. 보호무역주의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국제경제경쟁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해 선진국이 핵폭격과 같은 피해를 주는 것으로서, 대한민국은 이 협정으로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열어 놓게 되었다. 정부는 시장개방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96년 9월 12일 서방 선진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시장개방정책에 맞추어 낙후된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를 강조하고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경제는 1995년 10월 현재 수출사상 처음으로 1천억불을 돌파하고, 1996년 말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불을 돌파하여 선진국을 바짝 뒤쫓는 수준에 올라섰으나, 무역역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1996년의 경제성장률은 7%를 밑돌게 되었다.
 
=== IMF 사태 ===
{{본문|IMF 구제금융사건}}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 재벌 기업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통령인 [[김영삼]]은 [[11월 10일]] [[강경식]]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장기적인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997년 7월, [[기아자동차]]가 부도위기에 빠져 대한민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7,1,list1,15.html] 1997.7.15 mbc뉴스데스크</ref> 정부의 기아차사태와 대기업 연쇄부도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으로 경제는 더더욱 수렁에 빠졌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301_6187.html 정부, 기아사태 방치해 두었냐는 비난 면하기 어려워] 1997.10.22 mbc뉴스데스크</ref> 10월이 되자 아시아의 연쇄적인 금융위기로 한국도 IMF사태라는 위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고 종합주가지수는 500포인트 밑으로 추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460_6187.html 주가 5년만에 폭락] 1997.10.30 mbc뉴스데스크</ref>
 
11월이 되자 상황은 더더욱 심각해져 11월 18일, 환율은 달러당 1000원선을 훨씬 뛰어넘어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11_6187.html 이틀째 환율 폭등해 1027원까지 올라가면서 모든 거래 중단] 1997.11.18 mbc뉴스데스크</ref>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19일, 김영삼은 경제팀 일부를 개편하고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이었던 [[임창열]]을 경제부총리에 임명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19.html]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그날 임창열 부총리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환율제한폭을 사실상 철폐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49_6187.html 외환시장 안정위해 환율 변동폭 대폭 확대]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mbc와의 회견에서 임창열은 "우리 경제의 외환보유고가 10월말 현재 300억불에 달하고 수출이 10월부터 흑자기조로 바뀌면서 그런 면에서는 수출이 흑자가 나고, 다만 우리 국민들이 외환을 좀 아껴쓰셔서 여행이라던 지 해외 유학이라든지 이런 비용을 줄이는데 동참해 주시면 무역외 수지도 적자를 대폭 감축해서 외국에서 돈을 덜 빌리고도 경제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며 IMF구제 금융 가능성에 대해서는 "IMF 차관들을 얘기하시는데 IMF라는 데는 돈을 그냥 빌려주는데 가 아닙니다. IMF에서 돈을 빌려 줄 때는 정책의 조정을 그것도 강도 높게 조건을 붙여서 돈을 빌려줍니다. 그렇게 되면 은 지금 외국에서 우리를 보기를 금융 감독이 제대로 되고 있지를 않다 이렇게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융 감독을 포함해서 금융 개혁 법안은 반드시 조기에 확정이 되어서 국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대책이 서야 된다고 믿습니다."라는 발언으로 IMF구제금융에 대한 가능성은 사실상 부인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53_6187.html 임창열 신임 경제 부총리에게 듣는다] 1997.11.19 mbc뉴스데스크</ref>
 
그러나 다음날인 1997년 11월 20일, 환율은 제한폭을 철폐하자마자 환율은 무려 100원이상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진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196_6187.html 환율이 계속 치솟아 오늘 환율 1139원] 1997.11.20 mbc뉴스데스크</ref>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21.html] 1997.11.21 mbc뉴스데스크</ref> 임창열 총리와 스탠리피셔 IMF부총재는 1시간 가량 밀담을 나누며 IMF구제금융에 대하여 논의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27_6187.html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 1997.11.21 mbc뉴스데스크</ref> 그날 각 언론사마다 IMF가 뭐냐는 시민들의 항의와 투서가 빗발쳤고, 다음날 정부는 IMF에 20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62_6187.html 정부, IMF에 200억 달러 공식 요청하기로 결정] 1997.11.22 mbc뉴스데스크</ref> 11월 29일, 종합주가지수는 사상최악인 400포인트 이하로 추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569_6187.html 주가 한때 400선 붕괴, 누구도 주가 예측 못해] 1997.11.29 mbc뉴스데스크</ref> 11월 30일, 정부는 IMF와 협상을 벌였다. IMF의 지원조건은 저성장과 고실업이었고 이를 시행하라며 한국정부를 압박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1,1,list1,30.html] 1997.11.30 mbc뉴스데스크</ref>
 
결국 한국은 97년 12월 3일, IMF를 받아들였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3.html] 1997.12.3 mbc뉴스데스크</ref> IMF협상과정에 대해 시민들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지탄이 쏱아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747_6187.html IMF 협상 과정 허둥댔던 10일] mbc뉴스데스크 1997.12.4</ref> IMF를 받아들인 직후, 경제는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5.html] 1997.12.5 mbc뉴스데스크</ref> 환율은 12월 11일, 1700원대까지 폭등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11.html 1997.12.11 mbc뉴스데스크]</ref> 12월 12일, 증권업계 4위인 [[동서증권]]이 부도처리됐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020_6187.html 동서증권, 최종 부도처리] 1997.12.12 mbc뉴스데스크</ref> IMF는 IMF협약을 반드시 준수하라고 한국정부를 협박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050_6187.html IMF 합의 약속 지켜야 산다] 1997.12.13 mbc뉴스데스크</ref> 12월 23일, 환율은 사상최악인 2000원대까지 폭등하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23.html] 1997.12.23 mbc뉴스데스크</ref> 대한민국의 외채는 무려 1천 6백억달러에 달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83140_6187.html 우리나라 외채 1530억 달러,국민 1명당 580만 원 외채] 1997.12.30 mbc뉴스데스크</ref> 결국 김영삼의 임기말이었던 1997년은 [[IMF사태]]로 마무리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31.html] 1997.12.31 mbc뉴스데스크</ref>
 
== 사회 ==
1995년 8월, 교육부는 [[초등학교|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게 하였다. 1996년부터 모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개명하게 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200329101005&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08-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5508&publishType=00010 국민학교 명칭 바뀐다] 1995.8.12 경향신문</ref> 이 당시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쇠말뚝 뽑기운동이 일어났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21600209101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2-1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771&publishType=00010 일제 쇠말뚝 제거 정부 지원] 1995.2.16 동아일보</ref> 구 [[조선총독부]] 철거 작업을 실시, 같은해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에 들어갔으며<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58083_6157.html 광복 50주년 중앙 경축식,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1995.8.15 mbc뉴스데스크</ref> 총독부는 1996년 11월에 완전 철거되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2270020911201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27&officeId=00020&pageNo=12&printNo=23408&publishType=00010&doNotReadAnyMore=notClose 구 총독부 건물 완전철거] 1996.12.27 동아일보</ref>
 
* [[1993년]]지존파 일당 7명이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지존파 사건]]), 이들 중 6명의 사형이 1995년에 집행되었다. 전남 목포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참사]], 전북 부안군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1993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구포역 열차 전복]],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
* [[1994년]]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사고|성수대교 붕괴참사]],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대구 상인동 지하철1호선 가스폭발참사]],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시프린스 호 사고]]가 일어났다. [[1995년]] 지방선거 직후인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06,1,list1,30.html]] 1995.6.30 mbc뉴스데스크</ref>
* [[1996년 9월]]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다.(→[[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한총련]] [[연세대 사태]], [[명동성당]] 최초 경찰투입
* [[1997년]] [[황장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서기 대한민국 망명, [[KAL기]] 괌 추락참사, [[11월 21일]]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IMF구제금융사건|구제금융을 요청]], [[한보사태]], [[의정부 법조비리사건]]
 
== 문화 ==
예술가와 작가들의 반정부성 작품과 사회비판을 허용하였으며, 언론의 사회비판 역시 전면 허용하였다. [[1994년]]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되었던 시인 [[김남주]]를 석방했고, [[1994년]]에는 노동 시인 [[박노해]]를 석방하였다.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음란죄로 기소된 [[마광수]] 역시 무죄 판결을 내려 활동을 보장하였다.
 
== 내각 구성 ==
부처의 순서는 정부조직법<ref>정부조직법 [법률 제5153호, 1996.8.8, 일부개정] 제29조</ref> 에 의거한 순서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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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 [[김영삼]]
* [[김현철 (1959년)|김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