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18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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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호는 오당(梧堂), 자는 용성(龍成), 창씨명은 이토 나가센(伊東永善)
|학력=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오하이오주립대학교]] 농축산과 학사
|직업= [[정치인]]</br />[[기업인]]
|종교= [[유교]] → [[개신교]]
|배우자= 민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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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yunposun.com/history.htm 해평윤씨 홈페이지]
}}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경기도]] [[개성]]과 [[개풍군]] 등지에 대규모의 낙농, 목축업을 경영하였으며, [[송도학원]] 재단 이사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무렵에는 농림부장관과 무임소장관을 지내고, 휴전 이후에는 교육사업과 4H클럽 활동, [[로터리 클럽]] 활동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송도학원]]의 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인 [[윤치호일기]] 보존을 위해 일부 내용을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택배로 우송하였다. 이로써 윤치호 일기 중 일부는 [[한국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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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History-Goban Game in Seoul Korea 1904 (LOC).jpg|thumb|left|160px|조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오당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종로방 전동(현재의 종로구 견지동)에서 태어난 그는 [[윤치호]]와 중국 여인 [[마애방]]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머니 [[마애방]]은 중국 여인으로 아버지 [[윤치호]]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나라]] [[상하이]]로 망명했을 때 만나 결혼했다. 위로 누나 윤봉희가 있었고, 바로 아래로 일찍 요절한 동생 봉선과 광선이 있었다. 동생 [[윤광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비서일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그리고 바로 태어난 친여동생 [[윤용희]]는 [[미국]] 유학후 [[일제 강점기]] 당시 잠시 국내에 입국했으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거주하였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으나 증조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조부 [[윤웅렬]], 종조부 [[윤영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윤웅렬]]과 [[윤치호]]는 개화파 정치인으로 한참 활약중이었다.
 
==== 소년기 ====
어려서 그는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영어와 낙농, 목축 과정을 수학했다. [[1905년]] 어머니 [[마애방]]이 출산 중 산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윤치호는 2년 뒤 할머니 [[전주 이씨]]의 중매로 남포 백씨 백매려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 이복 형제, 여동생 6명과 남동생 3명이 태어났다. 이 중 [[윤기선]]은 [[피아니스트]]였고, [[윤장선]]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의 부영사와 총영사를 지냈다.
 
소년기에 그는 [[명성황후|민비]]의 친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민연희]](閔蓮禧 또는 閔連嬉)와 결혼한다. 민연희에게서는 아들 영구(英求), 승구(勝求), 용구(容求)가 태어난다. 영구는 교통부, 승구는 [[대통령]] [[윤보선]]의 비서, 용구는 [[서울특별시청]]의 공무원을 역임한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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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ebang.PNG|thumb|left|150px|어머니 [[마애방]]]]
 
아버지 [[윤치호]]는 국력의 양성을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낙농업, 목축, 양잠업, 경리회계 등의 교육을 한영서원에 도입했다. 그는 아버지 [[윤치호]]의 뜻에 따라 한영서원(송도중, 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며, 농과를 지원하여 농업과 낙농, 목축을 배웠다. 한영서원을 졸업한 뒤에는 1년간의 영어 과정을 추가로 수료하며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파일:Yunchiho1945.jpg|thumb|right|160px|아버지 [[윤치호]]]]
 
[[1914년]]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헐문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마운트 헐문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농축산과에 입학했다.
 
[[1922년]]에 [[6월]]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체류 중 그는 [[유일한]] 등과 연락하였다. [[유일한]]이 있던 [[미시간 주]]와 그가 있던 [[오하이오 주|오하이오]]는 붙어 있었으므로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나 [[대한인국민회]]일로 종종 만나 교류할<ref name="유일한1">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221페이지</ref> 수 있었다. 귀국 이후 목장을 경영하였고, 경성 YMCA 청년회에 참여하여 YMCA 청년회 이사와 총무, 고려의약품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귀국 직후 [[개성]] [[고려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농장, 목장 경영 ====
[[파일:Yun Chi-ho's Family-03.PNG|thumb|left|200px|윤치호 가족 사진([[1930년]]), 뒷줄 맨 왼쪽이 윤영선, 앞줄 왼쪽에 앉은 이는 아버지 [[윤치호]], 가운데는 할머니 이정무 여사, 오른쪽은 계모 백매려]]
 
[[1922년]] [[8월 2일]] 비행기편으로 귀국하였다. 윤영선은 [[개성]]에서 자기 전공을 살려 목축업을 하고, 얼음 보관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ref name="유일한1"/> 그러나 [[유일한]]의 창업도 도와주었고 회사의 진로에 대해 조언해주기도 했다.<ref name="유일한1"/> [[1923년]]부터 그는 [[송도고등학교]] 부설 송고 농장(松高農場)과 송고 목장(松高牧場)을 경영한다. 그는 한영서원 재단 이사의 한사람이 되어 재단의 업무를 맡는 한편, 한영서원 부설 농장과 목장의 관리인을 겸하였다. 아산과 개성에 있는 목장과 농원을 경영하면서도 송도고보에서 운영하는 송도고보 농장과 목장의 운영, 관리감독을 겸임하였다.
 
[[1923년]] [[1월]]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ref name="yn240">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ref>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ref name="yn240"/> 그의 아버지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ref name="yn240"/> 이라 봤다. 그해 [[9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을 추출해서 만든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ref>"개성의 부공 수상자", 동아일보 1923년 10월 29일자 4면, 경제면</ref>
 
[[1924년]] [[11월 29일]] 새벽 2시경, 종로방 견지동 68번지 윤영선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양복 외투와 현금 50원을 비롯한 3백원어치의 금품을 절도당했다.<ref>"윤씨저에 절도", 동아일보 1924년 12월 29일자 2면, 사회면</ref>
 
[[1925년]] [[9월]] [[송도고등학교]]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파일:Yun Chi-ho's Family 02.png|thumb|right|160px|숙모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윤영선,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은 아버지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6촌 동생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당숙 [[윤치소]], 그 옆은 종조모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당숙모 [[이범숙]],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은 당숙 [[윤치영]]]]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영향을 안 받을수 없어 [[일본]]의 [[만주]] 정책에 대해서도 아버지 [[윤치호]]의 견해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ref name="유일한1"/> [[1928년]]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했고, [[1929년]] [[7월 28일]]에는 [[개성]]의 지역유지 김정호(金正浩)와 함께 [[개성체육회]](開城體育會)를 조직하고 그해 [[9월 23일]] [[송도고등학교]] 씨름장에서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 기업, 사회 활동 ====
[[1929년]] 면직물과 메리야스를 제조 판매하던 회사인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그해 송고실업장의 재단이사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해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송도고등학교]] 부속기관에서 독립하고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으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의 한 사람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이순신]]의 사당과 위토가 매각위기에 처하자 [[윤치호]]는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영선은 여기에 10전을, [[윤일선]]은 20전을 각각 기부하였다.<ref>"충무공유적보존문제로 추모의결정체성 금답지", 동아일보 1931년 7월 22일자 6면, 사회면</ref>
 
[[1932년]] 송도중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송도소학교]](松都小學敎)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개성 제2송도보통학교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4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5년]] [[5월]] [[천안군]] 성환면 백석리의 오지를 방문했다가 교통편이 불편한 것을 보고, 교량 가설 비용 3백원을 기부하였다.<ref>"교량가설비로 윤씨가 삼백원", 동아일보 1935년 05월 08일자 3면, 사회면</ref> 그해 [[7월]] 개성의 언론사인 [[고려시보]](高麗時報)가 독자적 재단으로 출범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주식회사가 설립되자 고려시보사 이사 겸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어 격주간으로 발행되던 [[고려시보]]의 발행을 일간 발행지로 변경하게끔 자금을 지원하였다.
 
==== 태평양 전쟁 전후 ====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그도 문중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별도의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농장과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그 밖에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으로부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로부터 일본이 패망할 수 있지만 일본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으로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 광복 이후 ===
==== 광복 직후 ====
[[1945년]] [[8월]] 광복 이후 아버지 [[윤치호]]가 [[친일파]]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곧 사망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불이익이나 제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하였다.
 
[[1945년]] 주식회사 고려제약(高麗製藥)을 창립하는데 참여했고, [[1946년]] 고려제약회사 부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송도소학교]]의 업무와 고려제약 경영, [[개성]] 송도면과 [[아산]] 둔포면을 오가며 목장과 돼지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밖에 [[고려청년회]]와 고려청년회 주최 [[개성씨름대회]]에 전념하였다.
 
[[1948년]]부터 [[개성]] 지역의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개성약학대학]]을 유치하려 하자, 그는 [[개성]] 송도면에 있던 토지 5만평을 그해 [[10월]]에 기부하여 솔선을 보였다.<ref>"개성약학대학창립 김, 윤,공 삼씨의 특지로", 동아일보 1948년 10월 17일자 2면, 사회면</ref>
 
==== 정부 수립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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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n Yeon-hye 1950.JPG|thumb|right|130px|[[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중인 부인 민연희]]
 
[[1950년]] [[1월]]초에는 [[이승만]]으로부터 [[농림부|농림부 장관]]에 천거되었다. [[1월 22일]] 전임 장관 [[이종현]]의 사퇴 이후 궐위중인 [[대한민국]] 제3대 [[농림부|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가 [[농림부|농림부 장관]]에 취임할 당시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지주로부터 농지를 수매하고 그 토지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민 소작인에게 분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식량증산을 위하여 유휴지개발을 위한 실태조사를 하였고, 이와 더불어 유축농업 발전에도 역점을 두었다.
 
또한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정부 비축 양곡의 수를 늘려, 곡가 조절과 식량 수급의 원활을 기하고 전시와 흉년기의 빈민들을 구제하고, 농수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농수산물 증산과 품종 개량 정책 및 미국 잉여농수산물의 국내 유치를 추진하였다.
 
===== 한국 전쟁 전후 =====
[[한국 전쟁|6.25 전쟁]]이 터지자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솔들을 이끌고 바로 남하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인 [[윤치호일기]] 보존을 위해 일부 내용을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택배로 우송하였다. 이로써 윤치호 일기 중 일부는 [[한국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한국 전쟁|6.25 전쟁]] 중 동생 [[윤광선]](尹光善)의 납북 소식을 접하였다.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농수산물 증산의 성공과 외국의 잉여 농수산물의 유치를 통해 빈민과 아사자, 걸인 등을 구제한 공로로 [[국민훈장|국민훈장 모란장]](國民勳章牧丹章)을 받았다. 농림부장관을 그만둔 뒤 무임소장관으로 전시 내각에 참여하였다. [[1952년]] 휴전 이후 장관직을 사직하고 4H클럽활동에 전념하였는데, 4H클럽 중앙위원을 거쳐 중앙위원회 회장·고문으로 일하였다. 퇴임 직후 고려제약(高麗製藥)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퇴임 후에는 주로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1952년]]부터 30년간 [[송도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1954년]]에는 고려보험(현 [[쌍용화재해상보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4H구락부 중앙위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 양조금지법과 엿제조 금지법 ====
[[1952년]] ~ [[1982년]] 학교법인 [[송도고등학교|송도학원]](松都學園) 이사장이 됐다. 그는 각계의 협조와 도움으로 6.25 전쟁으로 폐교된 송도중, 송도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다시 부활시키고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부터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주조금지법 제정과 엿제조 금지법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를 두고 "[[막걸리]]는 농민의 양식이니까 말썽이 많을 테지만 쌀을 깎을대로 깎아가지고 만드는 정종 술과 함께 양조금지를 하고 또 구호물자로 들어오는 설탕을 골고루 지방에도 배분하여 당분을 취하자고 만드는 엿제조금지법을 아울러 제정하면 낭비되고 있는 쌀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ref name="ssalgap">"장관을 가라본댓자 쌀값 해결엔 별수없다", 동아일보 1952년 03월 05일자 2면, 사회면</ref>"
 
그는 장차관을 바꾼다고 해서 쌀값이나 물가가 안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했다. 한편으로 그는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해봤자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고의심하면서 우선 정부에서 쌀을 팔되 시민들에게 골고루 간편하게 분배되도록 각 동회(동사무소)를 통해서 파는데 생길 수 있는 폐단이 지금 방식의 폐단"보다 적으리라고 주장하였다.
 
그해 [[3월]] [[국제산업]] 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1953년]] [[2월 7일]]에는 범법자 계도 목적과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자문기관 목적을 겸하던 [[사법보호위원회]]가 재조직되면서, [[서울지검]] 2층에서 [[박흥식]] 등과 함께 사법보호위원회 위원으로 추가 위촉되었다. 한편 아버지 윤치호의 후원으로 유학을 다녀온 한경직 목사 등이 그에게 윤치호에게서 빌렸던 돈 백원을 이자를 쳐서 백만원을 그에게 전달하자 그는 아버지가 쓰신 돈이니 내가 받을 이유가 없다며 한사코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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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un-young-seon 02.PNG|thumb|160px|right|윤영선]]
{{참조|로터리 클럽|4H}}
[[1956년]]부터는 [[흥사단]]에서 주최하는 [[금요강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해 [[4월 20일]]에는 대성빌딩에서 "미국의 농촌청소년 지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57년]] [[농업은행]]([[농협]]의 전신) 중앙회의 운영위원에 선임되어 농촌 영농자금 공급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957년]] [[4월]] 농업은행 설립위원회 운영위원에 임명되었다.
 
[[1957년]] [[9월]] [[서대문구]] 노고산동의 보도를 횡단하다가 [[육군 헌병대]] 지프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ref>"이명은 즉사, 시내에 윤화사건", 동아일보 1957년 9월 9일자 3면, 사회면</ref>
 
[[1957년]] ~ [[1958년]]까지 서울[[로터리클럽]] 회장에 취임하여 [[로터리 클럽|한국 로터리]]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 공로를 남겼다. 그 뒤 서울 YMCA 청년회 총무를 거쳐 [[1958년]] ~ [[1959년]]까지 YMCA 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그 뒤 YMCA 총무에 재선되었다가 [[1960년]] 사퇴했다.<ref>자화상을 그리듯이 1 전택부 지음 | 범우사 | 1997) 224</ref> YMCA 기독교 청년회 총무가 되어서는 건물부지 마련을 위해 기탁금을 기부하여 종로 3가의 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1958년]] [[3월 25일]]에는 [[농촌은행설립위원회]] 운영위원, [[4월 1일]]에는 [[농업은행]](農業銀行中央會,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의 전신)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농촌 영농자금 지불 조건을 완화시키고, 영농자금 공급의 각종 불합리성을 시정케 하였다. [[1959년]] [[10월]]에는 YMCA 재단 회장이 되었다.
 
[[1960년]] 이후 보이스카우트활동도 참여하여 한국 청소년의 지도육성에 헌신하였으며, [[4월 19일]] [[4.19 혁명]] 때는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4H클럽중앙위원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비서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학교법인 [[송도고등학교|송도학원]](松都學園)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 은퇴와 최후 ====
[[1968년]] [[1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아버지 [[윤치호]] 및 할아버지 [[윤웅렬]]의 유품과 관복, 교지 등을 기부하였다.<ref>"고 윤치호씨 소장품 연대 박물관에 기증", 경향신문 1968년 01월 11일자 3면, 생활문화면</ref>
 
[[1975년]] [[5월 2일]] [[서울]]의 뉴서울호텔에서 [[곽상훈]], [[박종화]], [[모윤숙]], [[안호상]], [[이병도]], [[이갑성]] 등과 함께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의 창립 발기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서히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 및 유품을 사회에 기증하였으며, [[1980년]]에는 김형찬과 함께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윤치호]]의 편지 서신을 학계에 기증하였다.<ref>"격동기 구한말 재조명 윤치호 미공개서신등 180여점 발견", 경향신문 1980년 9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1982년]] 송도학원이 경영난에 처하자 개성 출신 기업가 [[이회림]]에게 재단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는 [[국민교육헌장]] 선포 10주년 기념 교육유공자 표창 때 [[국민훈장|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계묘구락부와 YMCA의 원로 모임에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1988년]] [[2월 6일]]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92세였다.
 
=== 사후 ===
[[2월 6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발인하였다.<ref>[http://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1022388&page=1&userDisplay=40&menuid=13&boardtype=L&articleid=395 카페<!-- 봇이 따온 제목 -->]</ref> [[2월 10일]] 오전 9시에 영결식을 하고 장지는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 선산에 안장되었다.
 
== 상훈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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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un Bo1.jpg|thumb|180px|right|6촌 동생 [[윤보선]]<br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아들 윤영구는 행정이사관에 이르렀고, 메트로 항공사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윤승구]]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당숙인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내다가 윤보선 퇴임 후 개인사업을 하기도 했다.
 
* 할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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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모 : 백매려(白梅麗, [[1890년]] [[8월 1일]] - [[1943년]] [[4월 30일]])
** 이복 동생: [[윤장선]](尹璋善, 다른 이름은 워싱턴<ref name="dd636">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ref>, [[1920년]] - [[2005년]] [[3월 25일]])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 이복 제수: 기세선(<ref name="dd635">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5페이지</ref>, [[1922년]] - [[2007년]] [[9월 28일]]<ref>미국 캘리포니아 LA 에서 사망</ref>)
** 조카 : 윤원구(尹元求, <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16341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金世容 전 안성상공회의소 회장 별세 外] 중앙일보 2004.03.29</ref>)
** 조카딸: 윤인경, 윤장선의 셋째 딸
** 조카딸: [[윤효진]](尹孝珍, [[1958년]] - ), [[대한민국]]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트]]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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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 매제: 조인호(趙麟鎬, ? - ?)
** 이복 여동생: [[윤보희]](尹寶姬, ? - ,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교수)
** 이복 매제: [[현영학]](玄永學, [[1921년]] - [[2004년]] [[1월 14일]] [[오전]] 9시<ref>https://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38444 </ref><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3675 </ref><ref>[http://www.kyosu.net/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411 ]</ref>, [[기독교]] [[민중신학]]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
** 이복 여동생: 윤영희(尹瑛姬, [[1926년]] [[3월 5일]] - , 미국 거주)
** 이복 여동생: 휘스넌트(Whisnant,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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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제약]]
*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 [[공성학]]
* [[김성수 (1891년)|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