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동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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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안]](隆安) 5년([[401년]])에 [[인도]]의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관중(関中) 땅에 들어와 국사(國師)로서 [[후진]](後秦)의 수도 장안에 들어오게 되고, 혜원은 구마라습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새로 출간된 경전에 대한 의문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그 서간을 모은 것이 《대승대의장(大乗大義章)》이다.
 
[[원흥]](元興) 원년([[402년]]), 혜원은 동지 123인과 함께 노산여산 산중의 반야대(般若臺)에 있던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 실천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 백련결사)의 조(祖)로서 모셔지게 된다. 다만 혜원의 염불행(行)은 후세의 《[[정토삼부경]]》(浄土三部経)에 기초한 전수염불(専修念仏)이 아니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기초를 둔 [[지관 (불교)|선관]](禪觀) 과 같은 선종 수행법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당시 여산을 포함한 [[장강]](長江) 중류 유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환현]](桓玄)에 대해서도 "불법(佛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승려로서 계율을 굳건히 지킬 것을 강조한 혜원은 계율(戒律)의 정비에도 힘써서 《십통률》(十誦律)의 번역 및 보급에도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