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전거 정보 틀 추가; 예쁘게 바꿈 |
Qkqhrhkdtn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
9번째 줄:
|목록=[[역대 일본 천황|일본의 제40대 천황]]
}}
'''덴무 천황'''({{ja-y|天武天皇|てんむてんのう}})은, [[
형인 [[덴지 천황]]이 죽은 뒤, [[672년]]에 [[임신의 난]]을 일으켜 조카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 [[고분 천황]])를 몰아내고 그 이듬해에 천황으로 즉위했다. 치세는 14년. 즉위 기간은 13년에 걸친다.
도교에 관심을 두고 [[신토
== 생애 ==
20번째 줄:
==== 탄생년도에 대한 의문 ====
덴무 천황의 삶과 업적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그런데 패전 뒤, 계도상 아버지가 조메이 천황으로서 덴지 천황의 남동생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의 이복형(내지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는 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ref>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은 실제 형제가 아니라는 비형제설이나, 생모인 고교쿠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혼인하기 전에 혼인했었던 다카무코 왕(高向王)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야노 미코(漢皇子)와 덴무 천황이 서로 동일 인물은 아닐까 하는 이부형설이 유명하다.</ref> 다만 위에서 말한 사료들 안에서, 덴지 천황을 덴무 천황보다 연하로 적은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덴지 천황의 생년에 대한 사료비판을 차치하고 덴무 천황의 생년만 계산해서 그만큼을 《일본서기》에 기록된 덴지 천황의 생년과 비교한다, 고 했을 때 역전이 생긴다는 것이다.<ref>덴지 천황에 대해서도 생년과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덴지 천황]] 참조.</ref> 어쨌든 덴무 천황의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다.
38번째 줄:
</tr>
<tr>
<td>《인수경》(仁壽鏡)
<td>스이코 천황 22년(614년)</td>
<td>불명</td>
</tr>
<tr>
<td>《고후쿠사약년대기》(興福寺略年代記)
<td>조메이 천황 3년(631)</td>
<td>조메이 천황 12년(640)</td>
</tr>
<tr>
<td>《[[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td>스이코 천황 22년(614년)</td>
<td>스이코 천황 22년(614년)</td>
</tr>
<tr>
<td>《
<td>스이코 천황 22년(614년)</td>
<td>스이코 천황 30년(622년)</td>
64번째 줄:
==== 이름의 유래 ====
덴무 천황의 휘는 오오아마(大海人)이다. 어려서
일본식 시호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ja-y|天渟中原瀛真人天皇|あまのぬなはらおきのまひとのすめらみこと}}'''). 「오키(瀛)」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동방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 사이메이 천황의 죽음까지 ===
오오아마의 아버지인 [[조메이 천황]]은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죽었다. 형인 나카노오에가 고교쿠 4년(645년) 6월 12일에 20세의 나이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했을 때, 오오아마는 나이가 어려 음모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사건의 결과로 소가씨 본종가는 몰락하고 퇴위한 [[고교쿠 천황]]의 뒤를 이어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다. 그 뒤 [[하쿠치]] 4년(653년)에 고토쿠 천황이 사이가 틀어진 나카노오에가 나니와(難波)에서 야마토(倭)로 옮길 때 행동을 함께 했었다.<ref>《일본서기》하쿠치 4년조. 이하 사실도 기본적으로 《일본서기》를 따라 기록한다.</ref> 이윽고 고토쿠 천황이 병으로 죽자,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복위하여 [[사이메이 천황]]이 되었다.
오오아마는 황태자가 된 형 나카노오에의 딸을 차례대로 네 명까지 아내로 맞이했다.
=== 덴지 천황의 즉위와 황태제(皇太弟) 책봉 ===
78번째 줄: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에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오아마가 동궁이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다. 덴지키 안에서 오오아마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된다. 《일본서기》는 임신의 난 이전부터 오오아마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기록대로 오오아마가 처음부터 황태자의 지위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임신의 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덴무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오아마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도 유력하다.
그가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고 있었는가 어쨌는가의 문제를 떠나, 일단 덴지 천황의 조정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도 않다. [[후지와라 씨]](藤原氏)
덴지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천황은 아들 [[고분 천황|오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사다이진]](左大臣) · [[우다이진]](右大臣)과 [[다이나곤|어사대부]](御史大夫)를 보좌로 붙였다(《해동제국기》).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람하는 관직으로서 그 직무는 기왕에 오오아마가 해온 일들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는 이 직후에 「동궁태황제가 관위 · 법도를 시행시켰다」고 적었지만, 「어떤 책에 이르기로는(或本云)」 하고 운을 떼며 오오토모가 이것을 했다고 주하고 있다. 또한 《회풍조》(懐風藻)
=== 임신의 난 ===
88번째 줄:
=== 치세 ===
오오토모가 죽은 뒤에도 오오아마는 한동안 미노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679년]])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는, 요시노 맹약을 행했다.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구사카베노 황자가 첫 번째,
▲오오토모가 죽은 뒤에도 오오아마는 한동안 미노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시마노미야(島宮)를 거쳐 오카모토노미야(岡本宮)에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大極殿)을 지었다.(두 궁을 아울러 아스카기요미하라노미야라 이름붙인 것은 만년의 일이다.) [[673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고<ref>황후는 이미 임신의 난 때부터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그에게 조언했다</ref>, 재위 기간에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다.<ref>조정의 요직은 주로 황족들이 맡았는데, 이것을 황친정치라고 한다.</ref> 또한 천황은 딸 오오쿠노 히메미코(大来皇女)를 [[사이오]]로서 [[이세 신궁]]을 모시게 하고<ref>이세 신궁에 대해서는 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끌게 도와주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ref>, 앞서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구다라노오데라(百濟大寺)를 옮겨 타카이치노오데라(高市大寺)로 삼는 등 신도와 불교를 아울러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덴무 천황의 여러 정책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679년]])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는, 요시노 맹약을 행했다.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구사카베노 황자가 첫 번째, 오오쓰노 황자가 다음, 가장 연장자였던 다케치노 황자(高市皇子)가 세 번째로 맹세했으며 이 서열은 덴무 천황의 치세 내내 유지되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은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덴무 천황의 소생인 구사카베는 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阿閉皇女, 훗날의 [[겐메이 천황]])와 혼인했고, 오오쓰는 야마베노 히메미코(山辺皇女)와 혼인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인 가와시마노 황자(河島皇子)는 덴무 천황의 딸인 하쓰세베노 히메미코(泊瀬部皇女)와 결혼했다.<ref>덴무 천황의 황후도 덴지 천황의 딸이었기에, 덴지·덴무 양계는 중첩적인 근친혼관계로 서로 엮인 셈이다.</ref>
천황과 황후는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에 율령을 정할 계획을 세웠고, 동시에 구사카베노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12년([[683년]]) 2월 1일부터는 오오쓰노 황자에게도 조정의 일을 맡게 했다. 오오쓰노 황자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다는 칭송이 있었다. 재위 14년만인 덴무 15년([[686년]]) 5월 24일, 덴무 천황은 병을 얻었다. 불법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후와 황태자에게 7월 15일에 정치를 위임했다.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슈초(朱鳥)로 정해졌다. 그 뒤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것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9월 11일에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두었다.
=== 장례와 능묘 ===
덴무 천황이 죽고 한 달이 지난 10월 2일에 오오쓰노 황자가 모반 혐의로 붙잡혀 바로 다음날 처형되었다. 빈소에 모셔진 시신은 오랫동안 매장되지 않고, 황태자가 백관을 인솔해 몇 번이나 의식을 반복해 지토 2년([[688년]]) 11월 21일에야 오우치 능(大内陵)에 묻혔다. 지토 3년([[689년]]) 3월 13일에 구사카베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가 천황으로 즉위했다(지토 천황). 능은 히노키기미오오우치 능(檜隈大内陵, 지금의 일본 나라 현
== 업적 ==
줄 102 ⟶ 101: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신의 난이 승리로 끝난 직후에도 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의 궁이 있던 오미의 오쓰노미야가 아니라 아스카의 옛 수도로 향해 갔다. 덴무 2년(673년) 윤6월에 왜국에 도착한 [[탐라]](耽羅)의 사신 앞에서 천황은 8월 25일,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은 받겠지만 선왕(덴지 천황)에 대한 조문 사절은 받지 않겠다」는 조를 내렸다고 한다. 임신의 난으로 「새롭게 천하를 평정하고, 처음으로 즉위」했다고 고함으로써, 덴지 천황의 후계자가 아닌 새로운 왕통의 창시자로서 자신을 평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거의 쫓기다시피 내려간 요시노에서 은거하다가 몇 안 되는 측근을 거느리고 도고쿠로 향해, 금세 수만의 군을 일으켜 불과 반년만에 승리를 얻어 천하를 움켜쥔 덴무 천황의 입지전적인 삶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일본에서 군주가 처음으로 「天皇」을 칭한 것은 덴무 천황이 최초라는 설이 오늘날에는 가장 유력하다. 일설에는 이 호칭이 처음에는 덴무 천황이라는 이 위대한 군주 단 한 명만을 위해 바쳐진 존칭이었고, 후대의 천황들이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이어받고자 「天皇」을 군주의 칭호로 삼아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ref>그 근거로 《일본서기》
치세 동안에 단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법관, 병정관 등을 자신의 직속으로 두어 스스로 정무를 보았던 덴무 천황은 조정의 요직에 황족을 등용했는데(황친정치)<ref>황족은 관위 26계제와는 별도로 황족에게만 마련된 5위까지의 관위를 지녔다.</ref> 그렇다고 해서 황족이 기존의 귀족 세력을 제치고 국가를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니었으며(덴무 천황 자신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권력은 어디까지나 천황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중신에게 정무를 맡기는 일도 없이, 신하의 합의나 동의에 의지하는 일도 없이, 천황 스스로가 군림하고 통치함으로써 그는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최고도의 권력 집중을 이루어냈다. 천황의 강한 카리스마는 고대 일본의 역사에서 천황 전제의 정점이 되었다.
줄 111 ⟶ 110: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은 덴무 2년([[673년]]) 5월 1일, 천황은 처음으로 궁정에서 일할 사람을 대사인(大舍人)으로 하여, 재능에 따라 직무를 맡기는 제도를 준비했다. 아울러 부녀로서 바라는 사람에게는 모두 궁에 들어와 근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ref>《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처음으로 [[다이나곤]](大納言) · [[츄나곤]](中納言)을 둔 것은 이 해의 일이다.</ref> 덴무 5년([[674년]]) 1월 25일에는 [[기나이]](畿內) · [[무쓰 국|미치노쿠]](陸奧) · [[나가토 국|나가토]](長門) 이외의 고쿠시는 다이산(大山) 이하로만 임명하도록 정했다(이는 관위상당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기나이 이외의 다른 구니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의 자손과 재능이 뛰어난 서민이 궁에 출근하는 것을 허락했다. 7년([[678년]]) 10월 26일에는 매년 관리의 고선(考選, 근무평가제)을 행하여 그에 따라 위계를 올려주는 제도를 정하고, 그 사무를 법관, 법관의 관리는 대변관(大弁官)이 맡도록 했다. 14년([[685년]])에는 새로운 관위를 정했다.<ref>이렇게 정돈된 관제도 태생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덴무 11년([[682년]]) 8월 22일에 천황은 근무평가에 있어서는 해당 인물의 족성을 제1기준으로 하도록 명하고 있다. 태생의 귀천도 관료제 안에 포함되었다.</ref>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 천황은 율령을 정하고 법식을 고치는 대사업에 착수했다. 이는 관리들에게 분담시켜 진행되었지만 천황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지토 3년([[689년]]) 6월 29일에야 영(令)만 발포되었다
덴무 천황이 확립한 여러 제도는 후대의 [[다이호 율령]]이나 요로(養老) 율령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지만 실질적인 의의나 내용은 같으며, 이는 율령관인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또한 덴무 천황 당시의 관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정무를 논의하는 여러 명의 나곤(納言)으로 구성된 태정관(太政官), 그 아래에 민관(民官) ・ 법관(法官) ・ 병정관(兵政官) ・ 대장(大蔵) ・ 이관(理官) ・ 형관(刑官)의 6관과 나머지 다른 관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에 따라 덴무조가 가지는 의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덴무 정권 아래서 일본 율령체제의 기초가 정해졌다는, 덴무조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 씨족 및 민정 문제 ===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향한 새로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천황은 호족과 지샤가 토지와 인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일체 부정하고, 여러 호족을 천황 중심의 관리 질서에 짜넣어 국가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정책을 펼쳤다.<ref>호족의 사적인 지배를 부정한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지배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태생의 귀천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거나 평등한 능력주의에 따른 관료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덴무 7년([[678년]]) 1월 7일에는 신분이 낮은 어머니를 두는 것을 금지한다는 기묘한 조를 내리고 있다.</ref> 우선 덴무 4년([[675년]]) 2월 15일, 선대 덴지 3년([[664년]])부터 모두에게 인정되었던 부곡과, 황족·신하·사원에게 인정되었던 산택·섬과 포구·임야·연못을 다시 거둬들인다는 조를 내렸다.[[파일:Tomimotosen Tobishimaike end of 7th century copper and antimony.jpg|thumb|180px|right|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로 인정받고 있는 부본전(富本錢)]] 나아가 현지의 유력자가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고 관위나 관직, 공적에 따라 개인에게 봉호(식봉)를 주는 형식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봉호 도입 자체는 덴무 천황 이전부터의 것이지만, 내막의 전환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5년(676년) 5월 14일에 서쪽 지방에 있는 봉호의 세를 거두어
일본 최초의 화폐로 여겨지는 부본전(富本錢)이 주조된 것도 덴무 천황의 시대다.<ref>《해동제국기》에는 덴무 12년인 계미년([[683년]])에 처음으로 수레를 만들고, 은전(銀錢) 사용을 정지시키는 대신 동전(銅錢)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했다.</ref> 다만 부본전은 주술용일 뿐 실제 시장에서 거래된 화폐는 아니었다는 설, 부본전보다 앞서 무문은전(無紋銀錢)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ref>일본의 화폐경제가 한반도보다 앞섰던 것에 대해 일본의 사회발전이 한반도보다 빨랐다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하지만, 정작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체제의 성공 요건은 중앙정부의 통제체제의 정비에 있었고 중국의 경우는 통일 제국이 안정되어가던 한 시대부터 상인을 천시하였다는 데에서, 화폐경제가 고대에 발달되었다는 뜻은 뒤집어보면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ref>
=== 숙청 그리고 위협 ===
덴무 천황은 고위 황족 신하에게
위협적인 조도 여러 차례 내렸다. 4년(675년) 2월 19일, 천황은 군신·백료와 천하의 인민을 향해 "모든 악을 하지 말라!"는 조를 내리고 있다. 6년([[677년]]) 6월에는 야마도노아야(東漢) 집안이 정치 모의에 참가했던 과거를 수십 년전의 일까지 끄집어내 꾸짖으면서, "큰 은혜를 내려 용서하겠지만 앞으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야마도노아야 집안으로서는 위협적인 언사를 던지고 있다. 8년([[679년]]) 10월 2일에는 "왕경(王卿) 등이 태만하여 악인을 간과하고 있다!"며 경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처벌은 한국이나 중국의 전제군주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천황이 이러한 숙청이나 위협적인 조를 내리는 시기는 주로 덴무 4년(675년)부터 6년(677년)에 몰려있는데, 그 무렵 천황은 부곡과 산택을 호족으로부터 거두어들여 국가공령화하는 조를 내리고 한창 식봉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천황의 정책으로 피해를 보게 된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서 처벌이라는 방법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임신의 난의 전후 처리를 봐도, 고관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없다. 처벌만큼이나 은사도 자주 내려서 8년([[679년]]) 12월 2일의 은사에 의해 그때까지
=== 외교 ===
덴무 천황이 임신의 난을 일으킨 것은, [[웅진도독부
보통 친백제적 성향의 형인 덴지 천황과는 달리 친신라적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받는 덴무 천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라계 도래인을 우대하지도, 백제계 도래인을 푸대접하지도 않았다. 덴무 2년(673년) 윤6월 6일에 사택소명(沙宅昭明), 3년(674년) 1월 10일에 구다라노고니키시 사이쇼(百濟王昌成)에게 관위를 추증했으며, 14년(685년) 10월 4일에는 옛 백제의 승려 상휘(常輝)에 대한 봉호 30호 지급 등 백제인에 대한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로부터 귀화한 도래인에게는 자신의 원년(674)부터 10년(681)까지 과세를 면제하고, 10년이 지난 8월 10일에는 입국할 때에는 아이였던 자들에게도 면제해주었다.
=== 군사 ===
덴무 4년(675년) 10월 20일, 여러 오키미(王) 이하 초위(初位) 이상의 관인의 무장이 의무화되었다. 5년([[676년]]) 9월 10일에는 실제로 무기를 검사했다. 8년([[679년]]) 8월에 적견역(迹見驛)의 집에서 왕경(王卿)들의 말을 달리게 하고, 11월에는 닷타(竜田) 산과 오사카(大坂) 산에 관을 두고, 나니와에는 외벽을 쌓아 올리게 했다. 9년([[677년]]) 9월 9일에는 나가라(長柄) 신사에서 대산위 이하 관인들의 말을 조사한 뒤 기사(騎射)를 해보이게 시켰다. 그 후 12년([[683년]]) 11월 4일에 여러 쿠니에 진법을 가르치도록 명했으며, 13년([[684년]]) 윤 4월 5일에는 "정치의 요점은 군사이다"라 선포하고, 문무 관인과 여러 사람에게 용병과 승마를 배우되 재차 무장이 부족한 사람은 처벌한다는 조를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14년([[685년]]) 8월 11일, 실제로 쿄와 기나이 지역의 인부들의 무기를 검사하고 있다. 11월 4일에는 군대에서 쓰는 지휘용 도구와 대형 무기를
율령제하에서 국군 주력의 위치에 있던 군단은 이 시대에는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덴무 천황은 관인과 기나이의 무장 강화를 특별정책으로 삼았지만, 이러한 관리 무장 정책은 덴무·지토조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관인의 무장화는 군단 창설 이전의 사정에 대응한 것으로 지휘용 도구를 고오리에 거두게 한 것 등 당시의 전국적인 병제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뉘고 있다. 고오리의 지방관이 인솔하는 병사들이 있었다는 설이나 후대의 군단과 거의 같은 것이 성립해 있었다는 설, 전통적으로 구니노미야쓰코가 지배해오던 현지 인민을 모아 편성한 구니노미야쓰코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 새로운 궁궐과 수도 ===
임신의 난이 끝난 뒤에도 덴무 천황은 한동안 미노에 머물렀다. 9월이 되어 천황은
아스카기요미하라노미야 주변에는 미야코(京)로도 불리는 도시적인 확대가 있었지만, 후대의 [[후지와라쿄
덴무 11년([[682년]]) 3월 1일, 천황은 미노노 오오키미 등에게 명해 지형을 답사하게 하고, 16일에는 그 자신도 직접 이곳을 찾았다. 이듬해 12년([[683년]]) 7월 18일에 미야코를 세울 땅을 둘러본 뒤, 13년([[684년]]) 3월 9일에 궁실을 지을 부지를 정했다.(수정된 도시계획으로 공사가 재개된 것도 그 때였다) 이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천황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천황의 능은 새로운 수도의 중심축이 되는 선을 남쪽으로 연장한 바로 앞에 쓰였다. 덴무 천황은 사후 즉위한 지토 천황에 의해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다시 재개되어 마침내 완성되었고, 이곳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천황은 모름지기 수도란 2,3개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고(부도제) 새로운 수도의 건설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2년(683년) 12월 17일에 나니와쿄(難波京)를 부수도로 설치했는데, 이곳의 건물은 선대 고토쿠 천황이 지은 나니와노미야(難波宮)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듬해 2월 28일에는 시나노에도 부수도를 만들 부지를 살펴보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되는 사신을 또 파견했지만, 이것은 일단 실행에는 옮겨지지 않았다.
줄 147 ⟶ 146:
덴무 천황은 일본 고대의 전통적인 문예·전승을 발굴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외래의 것이 배척된 것은 아니지만, 덴무 이전과 이후의 여러 천황들과 비교해볼 때, 일본 토착 문화의 발굴과 정돈을 향한 그의 노력은 현저하다.<ref>만약 임신의 난이 실패로 끝나 덴무 천황이 즉위하지 못했다면, 《고사기》나 《만요슈》로 대표되는 토착적인 일본 문화는 《일본서기》·《회풍조》로 대표되는 중국풍 문화에 침식되어 혹은 전해지지도 못하고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ref> 야마토(倭)라는 국호를 '日本'으로 정하고, 군주의 호칭을 '天皇'으로 칭한 것은 덴무 천황이 최초라는 것이 유력하다.<ref>자료상으로 볼 때 스이코 천황의 치세 때에도 위의 호칭을 쓴 것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도 '天皇'이라는 호칭이 당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군주의 호칭으로 쓰이고 있는 등 개개의 자료가 가진 성격에 따라 의심나는 것을 감안할 때 덴무 천황 때까지 훨씬 내려간다.</ref>
또한 덴무 천황은 그 전까지 민간에서 전해지던 습속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그것을 국가 단위의 제사로 소급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술할 신도의 제사를 포함해 후대에까지 전통으로 전해진 주요 궁정 의식의 대부분은 덴무 천황에 의해 창시(혹은 집대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세치노마이(五節舞)<ref>다이니이노마쓰리나 니이나메노 마쓰리에서 45명의 무희가 추던 무용.</ref> 는 그 확실한 예로 꼽히며, 니이나메노마쓰리(新嘗祭)<ref>음력 11월 23일에 천황이 천지사직의 신들에게 행하던 풍년제의 일종.</ref> 를 국가제사로 승격시켜 다이죠사이(大嘗祭)<ref>일본에서 천황이 즉위한 후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에게 지내는 첫 제사.</ref> 를 마련한 것도 덴무 천황이었다. 예술적으로도, 덴무 4년([[675년]]) 2월 9일에는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노래에 뛰어난 남녀·난쟁이·기인들을 궁정에 모으도록 명하고, 4월 23일에 그들에게 녹을 주었다. 6년([[677년]])에 처음으로 시부(詩賦)를 지었다.<ref>《[[해동제국기]]》
정치적으로는 덴무 10년(681년) 3월 17일에 황태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훗날 완성되는 《일본서기》 편찬 사업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히다노 아레(稗田阿礼)로 하여금 역대 천황의 계보와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구사(舊辭) 등의 기록을 암송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오노노 야스마로에 의해 성문화된 것이 바로 《고사기》이다. 모두 천황 사후에야 완성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사서로 꼽힌다.<ref>《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을 서로 병행하게 한 의도에 대해서는 정해진 설이 없고, 내용은 다분히 천황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중국풍의 장대한 한문 문장으로, 일관성없게 여러 설들을 죽 늘어놓은 《일본서기》가 여러 편찬자들과의 합의 및 분담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분량도 비교적 짧고 문체도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고사기》는 덴무 천황 개인의 의지가 많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ref> 한편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덴무 천황은 재위 4년([[675년]]) 1월 5일에 일본 최초의 천문관측기구인 점성대(占星臺)를 세우게 하기도 했다.
줄 155 ⟶ 154:
=== 종교 정책 ===
==== 신도(神道) ====
일본의 전통적인 토속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했던 덴무 천황은 지방에서 행해지던 제사의 일부를 국가 단위의 제사로 승격시켰다.<ref>오늘날 그의 신도 진흥 정책은 외래 문화의 침투에 맞서 일본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천황의 노력이라는 것도 각지의 전통적인 제사를 그대로 보존하기보다는 천황가의 시조로 여겨지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의 관계에 따라 각지의 신을 평가해 계급을 매겨 천황 중심으로 체계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천황 권력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각지에서 모셔지고 있던 현지 신사와 여러 제의는 보호와 교환의 형태로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 따랐으며, 고대의 국가 신도가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ref> [[파일:Naiku 01.JPG|right|250px|thumb|이세 진구. 내궁(內宮)]] 덴무 천황이 특별히 중시한 것은 이세 신궁이었다. 일찍이 임신의 난 때, 군사를 거느리고 [[이세 국|이세]]를 찾았던 그는 세키타가와(迹太川) 부근에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올렸는데, 이는 구체적으로는 이세 신궁에서 모시고 있는 신이기도 한 아마테라스에게 전승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난을 승리로 이끈 뒤, 천황은 딸인 오오쿠노 히메미코를 이세 진구에 보내어 사이오(齋王)로서 이세 진구를 섬기게 했다. 덴무 4년([[675년]]) 2월 13일에는 딸 도오치노 히메미코(十市皇女)와 조카(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阿閉皇女, 훗날의 [[겐메이 천황]])가 이세 신궁에 참배했다. 이세 진구의 모든 신전을 20년에 한 번씩 다시 짓는다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의 제도를 처음 발안한 것도 덴무 천황이다.<ref>시키넨센구를 처음 행한 해에 대해서는 덴무 14년(685년)과 지토 2년(688년)이라는 두 개의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덴무 천황의 발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ref> 이세 신궁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신격을 처음으로 창조한 것은 다름아닌 덴무 천황이었다는 설도 있다.<ref>아예 있지도 않은 것을 창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세 지방 안에서 모시던 태양신을 천황가가 모시던 신과 동일화하여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신격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 밖에, 덴무 3년(674년) 8월 3일에는 이소노카미 진구(石上神宮)에 오사카베노 미코(忍壁皇子)를 보내어 그곳에서 소장하던 신보(神寶)를 다듬게 했다. 이듬해 1월 23일에 여러 진쟈에 제사드린것을 두고 기넨노사이(祈年祭)<ref>
==== 불교 ====
이미 즉위 전에 요시노로 낙향하기에 앞서, 승려로서 출가했던 경력이 있었던 천황은 재위 2년([[673년]]) 3월에 가와라데라(川原寺)에서 《[[수트라|일체경]]》(一切經)을 필사하게 하는 대규모 사경작업을 행했다. 5년([[676년]])에는 전국에 사자를 파견해 《금광명경》(金光明經)
덴무 14년(685년) 3월 27일, 천황은 집집마다 불사(佛舍)를 짓고 예배·공양하라는 조를 내렸다.(여기서의 '집'이 어느 정도의 인원수의 단위인가는 불명하지만,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무렵까지 기나이를 제외하고 다른 지방에 불교 사찰의 수는 적었지만, 덴무·지토조에 이르러 전국에 우지데라(氏寺)<ref>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일종의 특정 집안 소유의 개인 사찰.</ref> 이 활발히 축조되었다. 유적에서 발굴된 기와를 통해, 중앙에 위치한 소수의 사찰마다 지역을 분담해 건설을 지도하는 등 정책적인 지지가 이루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불교사학자
그러나 이러한 천황의 불교 보호는 승니들에게 사찰에 틀어박혀 천황이나 국가를 위한 기도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불교를 국가에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국가신도가 너무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국가신도를 견제하기 위한 천황의 '국가불교'인 셈이다. 덴무 4년에 여러 사찰에 내려졌던 산림과 천택을 거두어들이고 8년에는 식봉을 내리는 등 사찰의 수입을 국가가 관리하기도 했다. 중앙통제기관으로는 스이코 천황 때에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던 승정·승도 등을 부활시켜 승강제를 정비했다.<ref>승려들의 위의와 복장까지도 규제하는 등, 모든 사찰과 승려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가 덴무조에는 강하게 이루어졌다.</ref> 천황의 불교 이해나 그 대하는 자세도 내세보다는 현세에서의 이익을 추구한 피상적인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천황이 수도와 각 지방의 사찰에서 설법하게 한 것은 《금광명경》이나 《인왕경》같은 호국불교적 사상에서 중시하는 경전으로, 개인의 구제나 불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진 흔적이 없다. 덴무 천황 개인의 입장에서 불교에 요구한 것은 황후와 자신의 병 치유였지 불교의 자아부정이나 이타 사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 도교 ====
덴무 천황의 종교관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도교적인 요소이다. 천황이 제정하게 한
== 인물상 ==
덴무 천황은 종교나 초자연적인 힘에 관심이 많고 신불에 대한 믿음도 두터웠다. 《고사기》에는 덴무 천황이 꿈 속에서 들은 노래의 내용을 풀이하여 한밤중의 물에 던져, 자신이 황위에 오를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문둔갑에 뛰어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임신의 난에서는 스스로 점을 쳐서 장차 천하가 양분될 징조를 예측했다거나 여러 신들에게 기도하여 뇌성폭우를 그치게 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모두 도교적인 기능이다. 즉위 뒤에도 종교나 의식에 대한 관심은 잦아들지 않았으며, 운세의 활용이나 신불에 대한 기원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능력은 후세에 천황이 사람들 사이에 신이나 다름없는 카리스마성을 몸에 지니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덴무 천황이 읊은 와카는 후지와라 부인과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것과 요시노의 '요시'를 반복하는 노래, 그리고 요시노의 외로운 길을 노래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한시를 읊었다는 사료는 없다.<ref>단지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 것 뿐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냥 천황의 취향이 한시보다는 와카에 더 흥미가 있었던 탓으로 보기도 한다.</ref> 천황의 취미는 수수께끼 내기와 같은 서민적인 모습이 많았는데, 덴무 14년([[674년]]) 9월 18일에 황궁 대안전에서 바쿠치(博戯) 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의 유협적인 모습도 지녔다. 위에서 든 각종 예능자에게 대한 후대도 천황의 기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천황이 민심을 살피는 데에 뛰어났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분랴쿠 2년([[1235년]])에 덴무·지토 합장릉이 도굴당했을 때의 조사기록인 《아후노야마료우키》(阿不之山陵記)
== 주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