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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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수궁(隋宮)』, 『마외(馬嵬)』 등 [[역사]]에서 제재를 따온 영사시(詠史詩)나 영사시(詠事詩)에도 정평이 났으며, [[장안]](長安) 동남쪽 교외의 고대(高台)에서 읊었다는 『낙유원(楽遊原)』은 이상은의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상은 시의 또 한 가지 기교적 특징으로는 벽전(僻典の多用が挙げられる。)을 많이 사용하였다는 데에 있다. 제한된 글자수 안에서 뜻을 표현하는 한시의 경우 누구나 아는 에피소드 등에서 등장하는 인상적인 말을 써서, 원래 에피소드 내용을 감상자들에게 떠오르게 함으로서 시의 내용을 부풀리는 기교를 사용하는데 이를 전고(典故)라고 한다. 지식인 계급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에피소드, 예를 들면 경서(経書)나 장자(荘子)・사기(史記)・한서(漢書)・삼국지(三国志) 등에서 전고를 응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리고 이들 자료들이 가장 널리 쓰이는 전고의 소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상은은 이러한 서적뿐 아니라 패사(稗史)나 소설(小説) 같은 당대 지식인 계급이 손대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던 잡서에서도 전고를 끌어다 사용하였다. 이것이 시에 깊이를 주는 동시에 난해하게 만드는 원인도 되고 있다. 이상은이 시를 지을 때, 좌우에 많은 서적들을 늘어 놓고 참고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물고기를 눈앞에 나란히 놓고 제사지낸 다음에 먹는다는 전설에 착안하여 이상은을 달제어(獺祭魚)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에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인으로 고전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노래하려 한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이상은의 이 아호에서 따온 달제서옥주인(獺祭書屋主人)을 자신의 호로 썼다.
 
관료로서는 불우했지만 이상은의 시는 살아있을 당시부터 높은 평가를 얻어, [[백거이]]는 만년에 이상은에게 "죽어도 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며, 같은 만당 시인으로 꼽히는 온정균이나 당이 멸망할 당시의 한악(韓偓)도 그 영향을 짙게 받고 있음이 지적된다. 5대 10국 시대 촉(蜀)의 위곡(韋縠)의 『재조집(才調集)』에는 이상은의 시가 유독 많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염하고 유미적인 그의 시풍은 높은 평가를 받아 그 추종자가 생겨났고, [[북송]](北宋) 초기에 일대 유행을 일으킨 서암체서곤체(西崑体)의 시조가 되었다. 북송의 양억(楊億)・전유연(銭惟演)・유균(劉筠) 등 조정의 문관들이 중심이 되어 화답한 시를 모아 였은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의 제목에서 유래한 이 서곤체는 이상은에게서 그 전범을 찾는 것으로 조탁을 꾸민 수사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특징으로 하는 그 시는 외견상 이상은의 것에 가까웠지만, 북송 중기에 이르면 [[구양수]](欧陽脩)나 [[매요신]](梅尭臣) 등의 비판을 받아 배척당했다. 오히려 그 직후 [[왕안석]](王安石)에 의해, 이상은의 시에는 이상은이 사사했던 두보와 동급의 많은 인간들에 대한 통찰이 있으며 화려한 표현 뒤에는 이상은의 진실된 인격이 엿보인다는 정당한 평가가 내려졌다. 오늘날 이상은의 평가는 왕안석의 설에 영향을 받고 있다. 비슷하게 완약한 시풍을 특징으로 한 [[온정균]](温庭筠)과 함께 온이(温李)라 불렸으며, 두목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로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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