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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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벼락 출세 ===
[[안후이 성|초국(
[[345년]], 유량(庾亮<ref>유량(庾亮): 도간(陶侃)이 창설한 서부군단(西府軍団-[[양쯔강]] 중류지역 방비군)의 군단장</ref>)의 동생 안서장군(安西将軍) 유익(庾翼)이 죽자 환온은 그의 후임으로 안서장군 겸 형주자사(荊州刺史)에 기용되어 [[무한(武漢)|무창(武昌)]]을 수비했다. 강대한 군사력을 거머쥔 실력자로 성장한 환온은 [[347년]]에 손성(孫盛) 대도독의 지휘를 받아 [[쓰촨 성|사천(四川)]]의 [[성한|성한국(成漢國)]]<ref>('''成漢''', 성한, 병음(拼音):Chéng Hàn, [[304년]]~[[347년]]) 성한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
파죽지세로 불어나는 환온의 힘에 위기감을 느낀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ref>사마도자(司馬道子): 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의 7남이자 차기 황제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의 친동생. 황실에 위협이 되는 강력한 신하가 나올 때마다 황제 대신 견제를 하고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인물. 환온(桓溫)의 위협도 잘 방어했고 뒤이은 사안(謝安)의 잠재적 위협 역시 미연에 잘 방지해내 종묘사직을 지켜냈다. 그러나 환온과 사안의 사후(死後), 환온의 아들 환현에게 기습을 당해 살해된다.</ref>가 환온의 죽마고우인 은호(殷浩)를 등용, 북부군(北府軍-<small>동진(東晉)이 북벌을 위해 창설한 군대</small>) 대장에 추천하여 환온의 대항마로 삼았다. [[352년]] 음력9월, 은호는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환온보다 먼저 상주(上奏)하여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군을 북쪽에 진군시켜 [[쉬창 시|허창(許昌)]]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부하가 적에 내통을 하여 [[후진 (오호 십육국)|후진(後秦)]]의 대장 요양(姚襄)에게 참패하였다. 환온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패장 은호를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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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권의 장악 ===
환온은 [[후조|후조(後趙)]]가 [[염위|염민(冉閔)]]에 의해 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북벌을 결행하였지만 [[354년]]의 [[전진|전진(前秦)]]의 정복엔 실패했다. 다만 [[356년]]에 은호의 군대를 격파했던 요양(姚襄)의 군세를 격파, 동진이 아직 [[서진|서진(西晋)]]이던 시절<ref>[[서진|서진(西晋)]]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난 것이 동진(東晉)이다. 그래서 동진 사람은 누구나 원래 고향을 수복하고 싶어했고 중국의 재통일을 원했다.</ref> 구(舊) 도읍인 [[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환온은 귀국후 그 공으로 [[중국의 재상|대사마(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라 [[364년]]에 이미 갖고 있던 형주자사에서 양주자사(揚州刺史)<ref>동진의 수도 낭야(琅邪) 근처의 모든 병권을 갖게됐다는 뜻.</ref>로 전임됐고 [[369년]]에는 연주자사 겸 서주자사를 아예 겸하게 되어 [[양쯔강]] 하류의 모든 영역의 군세를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세인 서부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친구이며 동진의 명문 귀족 유담(劉淡)이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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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晩年) ===
그후 화북 지방에선 [[전연|전연(前燕)]]이 세력을 확대하여 [[365년]]에 낙양을 뺏겼다. [[369년]]에 환온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지만 [[전연|전연(前燕)]] [[모용수|모용(慕容) 황제]]에게 대패한다. 여기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371년]]에 황제를 폐위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지만 새로 세운 황제가 얼마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병사했다. 간문제(簡文帝)의 임종을 맞아 환온은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계략을 꾸미지만, [[사안|사안(謝安)]], 왕담지가 이를 간파하고 환온에게 당시 황태자였던 [[효무제|효무제(孝武帝)]]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선수를 친다. [[사안|사안(謝安)]]이 환온에게 보낸 서간(書簡)에는 '대사마(大司馬)께서 [[제갈량|제갈무후(諸葛武侯)]]가 되어 주십시오' 라고 했다한다. 제갈무후(諸葛武侯)란 [[유비|유비(劉備)]]의 아들 [[유선 (공사)|유선(劉禪)]]의 섭정이었지만 결코 황위를 뺏지는 않았던 제갈량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온은 계획을 계속 진행시킨다. 환온은 조정에 명하길 자신에게 '구석(九錫)의 예(禮)'<ref>대권을 노리는 신하가 황제 자리를 찬탈하기 직전에 황제에게 요구하는 9가지의 예. [[조조|조조(曺操)]]가 [[후한 헌제|헌제(獻帝)]]에게 요구했었다.</ref>를 허하라고 요구했다. 사안(謝安)은 어떻게든 이를 지연시켜보려고 애를 썼고 환온은 [[373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후 [[사안|사안(謝安)]]이 상서복야(
== 환온(桓溫)이 관련된 고사성어 ==
* 죽마고우(竹馬故友)란 고사성어는 환온이 은호(殷浩)를 실각시키던 그 날 "은호와 나는 소꿉친구로 죽말(竹馬)을 타며 노는 사이었지만 항상 그 녀석은 내가 타다버린 죽말을 주워서 노는 처지였지<ref>『[[진서|진서(晋書)]]』은호전(殷浩傳)</ref>."라고 말했던 데서 유래했다 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죽마고우란 말은 사이가 좋은 어린시절 친구란 뜻만 가지지만, 원래는 어디까지나 골목대장과 부하같은 상하관계(上下關係)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한 죽마(竹馬)는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죽마가 아닌 단순히 잘린 대나무나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뛰어다니던 것을 '죽마를 탄다'고 했다한다.
* 애(내장)를 끊는다란 뜻의 '단장(斷腸)'이란 말은 환온이 [[성한|성한(成漢)]]을 정벌하러 [[쓰촨 성|촉(蜀)]]에 들어갈 때의 일에서 유래했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새끼 원숭이를 잡아 애완용으로 데려가고 있었는데 어미 원숭이가 백리를 울며 멀찍이 따라오다가 제 풀에 지쳐 죽었길래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전부 끊어져 있었다. 보고를 받은 환온이 크게 화를 내며 해당 병사를 파면하고 벌을 줬는데 이를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ref>[[송나라|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책. 후한(後漢)부터 동진(東晋)에 이르는 귀족(貴族)ㆍ학자(學者)ㆍ문인(文人)ㆍ승려(僧侶)들의 덕행(德行)ㆍ언어(言語)ㆍ문학(文學) 등(等)에 관한 일화를 엮었다</ref>의 '단장(斷腸)'이란 구절에서 현재의 '애를 끊는다'는 표현이 유래됐다고 한다<ref>이와 유사한 얘기가 [[수신기]](搜神記)에도 실려있다.</ref>.
* [[진서|진서(晋書)]] 환온전(桓温伝)에 '후세에 처음의 꽃같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악취가 만권의 책에 실어도 모자르네' 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데 후일 [[자치통감|자치통감(資治通鑑)]] 이나 [[십팔사략|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온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年)-아름다운 이름은 백년을 가고 더러운 오명(汚名)은 만년을 간다'라는 표현은 환온전(桓温伝)의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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