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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형주를 다스릴 때 그의 부하가 되어 형주종사를 맡았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 뒤 형주에 남겨져 주의 사무를 처리하는 일을 했다. 유비에게는 신임을 받았지만, [[양희]](楊戱)전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따르면 형주독인 [[관우]](關羽)에게는 [[미방]](糜芳)과 [[사인 (후한)|사인]](士仁)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219년[[219]]년 [[여몽]](呂蒙)의 계략에 의해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미방과 사인이 배반, 관우도 살해되어 형주는 손권에 의해 점령되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형주에 있던 유비의 부장과 관리들 대부분은 손권에게 귀순했지만, 반준 혼자만 자택에 칩거해 출두하지 않았다. 손권은 부하에게 명하여 반준의 설득했지만, 반준은 침대 위에서 울면서 출두를 거부했다. 이에 손권은 반준을 침대에 묶어 자기 앞으로 연행시켜, 스스로 그를 설득해 감복시켰다. 반준은 보군중랑장, 형주의 군사로 위임되었고 (강표전에 따르면 치중도 겸임) 곧 분위장군으로 승진해, 상천정후로 봉해졌다.
 
강표전과 양양기에 의하면 [[220년]] 무릉군의 종사였던 [[번주]]가 무릉만 이민족들과 규합하였고 221년 이전에는 반준의 동료였던 [[습진]](習珍)도 이에 호응해 스스로 소릉태수를 자처하며 관우의 복수전으로 오나라 토벌을 위해 이릉으로 향하는 유비에게 호응하려 하였다. 손권은 번주와 습진이 구면이기도 하고 형주의 사정에 밝은 반준에게 가절을 하사해 여러 군을 통솔시켜 [[보즐]](步騭)과 함께 진압을 맡겼다. 반준은 신상필벌을 행하여 군대의 규율을 철저히 바로잡고 토벌에 나서, 이민족을 진무하는데 성공했다. 저항하던 습진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습진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오서 주방전에 따르면 후에 파양태수 [[주방 (동오)|주방]](周魴)이 위나라의 [[조휴]](曹休)에게 보낸 항복 편지에 의하면, 반준은 무릉만 이민족들 중 항복한 사람들을 다수로 편입해서 강대한 군세를 인솔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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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에 따르면 태자 [[손등]](孫登)의 빈객인 [[예현]](芮玄)이 [[226년]]에 죽은 후, 그 병사를 흡수해 하구에 주둔 했다고 한다.
 
[[229년]] 손권이[[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반준은 소부로 임명되었고 유양후로 봉해졌다. 이후 태상으로 승진하였고 [[육손]](陸遜)과 함께 무창의 수비를 맡았다고 한다.
 
이전에 보즐은 226년부터 구구 땅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표기장군이 된 229년 이후에 형주에서의 군권 확대를 꾀하여 사병을 모으는 것을 허락받고자 손권에게 고하였다. 손권은 보즐이 그 지방에서 군벌화할 것을 걱정하는 반준의 의견을 따라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 명성이 높았으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은 중랑장 [[서종]]을 베었다. 이와 같은 예들은 반준이 법을 존중해 사람들의 평판에도 개의치 않았던 예로 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