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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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박희태는 [[1938년]] [[8월 9일]]에 [[경상남도]] [[남해군|남해]]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13회 [[고등고시]] [[사법시험 (대한민국)|사법과]]에 합격했다. 이후 오랫동안 검사로 재직하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어 고향 [[남해군]]·[[하동군]]에서 당선되어 제13대 국회에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3년]] [[문민 정부]]의 초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중 국적을 가진 딸이 대학에 특례입학 혜택을 받은 것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 10일만에 사퇴하였다. 초선 때인 1988년 12월부터 당 대변인을 맡았다. 이후 4년 3개월간 대변인을 계속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9865758 박희태 지음 "대변인"]</ref> 대변인 시절에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등의 정치 조어를 만들어냈다.<ref name=autogenerated1 /> 17대 의원때는 국회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5선을 기록한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중진의원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2008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 후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정몽준]] 의원을 제치고, 한나라당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09년 9월 7일 경남 양산 재출마 선언으로 당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2009년 10월28일 양산 재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내세운 친노 후보 [[송인배]]에게 쫓기며 고전하다 3천여표 차(박희태 3만801표(38.1%), 송인배 2만7천502표(34.1%))로 가까스로 당선됐다.
 
== 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