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복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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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년]] 정월 27일에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 대와 실 5백 근, 면 1천 근, 포(布) 1천 단, 위(韋) 1천 장, 곡식의 종자 3천 곡을 보내고, 백제왕에게는 포 3백 단을 보내고 있다. 7월 30일,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이 이끄는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大山)·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빼앗아 차지했다. 복신 등은 강에 임해 있는 요충지인 진현성(眞峴城)에 군사를 더해 지켰지만, 유인궤는 한밤중에 신라군을 몰아 성가퀴에 오르게 하고,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죽이고 성을 빼앗았다. 이것으로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는데 성공한 유인원은 본국에 증원병력을 요청했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치(淄)· 청(靑)· 내(萊)· 해(海)의 수군 7천 명<ref>40만 명이라고 적은 것도 있다.</ref>이 백제로 보내졌다.(《삼국사기》)<br />
 
12월 1일, 백제 부흥군 지도부는 수도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 벽성壁城 즉 지금의 [[김제]])으로 옮겼다. 주류가 논밭과는 멀리 떨어진 곳인데다 돌이 많고 척박해 농사짓기가 어려워 백성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왜군 장수 에치노 다쿠쓰만이 적과 너무 가깝고 지대도 낮다며 반대했지만 지도부는 피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이듬해([[663년]]) 2월, 신라의 김흠순과 김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의 거열성(居列城)·거물성(居勿城)·사평성(沙平城)을 차례대로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백제군은 1,07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신라군은 부흥군 지도부가 있는 피성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결국 옮긴지 두 달 만에 백제 지휘부는 에치노 다쿠쓰의 말대로 도로 주류성으로 옮겨갔다.(《니혼쇼키일본서기》·《삼국사기》신라본기)<br />
 
==== 몰락과 죽음 ====
백제 지도층 내부에서는 이미 발족 초기부터 알력이 끊이지 않았는데, 부여풍이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복신은 승려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까지 차지하여 모든 병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복신의 옆에서 풍왕은 그저 제사만 주관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차 벌어지면서, [[풍왕]]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했다.<ref>《니혼쇼키일본서기》에 따르면 서기 663년 6월의 일이었다.</ref> 《니혼쇼키일본서기》에 의하면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진 채 [[젓갈]]이 되었다 한다.<ref>《구당서》는 복신이 먼저 풍왕을 죽이기 위해 병을 핑계로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풍왕에게 엄습당해 죽었다고 했으나, 《니혼쇼키일본서기》는 풍왕이 먼저 복신을 의심해서 그를 잡아 죽였다고 했다. 단재 [[신채호]]는 《니혼쇼키일본서기》의 기록을 택함에 1) 모든 군권을 장악한 복신이 실권 없는 풍왕을 당장에 죽이지 않고 동굴에 누워있다가 문병 오기를 기다려 죽이려고 했다는 점, 2) 《니혼쇼키일본서기》에서 복신의 사망시점으로 지목한 6월 직후인 7월에 [[당나라]]군이 백제 부흥군을 공격해 여러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는 점, 3) 각처의 성책이 거의 다 함락된 절박한 상황에서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다는 점 등, 세 가지를 들어 《구당서》의 오류를 지목하고 있다.(조선상고사)</ref>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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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 《니혼쇼키일본서기》에서는 풍왕이 복신을 처형하려 할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는 이미 이러하다. 베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하고 묻자, “이런 악역(惡逆)한 자를 풀어 보낼 수는 없습니다.”라며 풍왕의 역정을 드는 달솔 덕집득(德執得)에게, 손바닥이 가죽끈으로 꿰여 결박된 와중에도 침을 뱉으며 “이 썩은 개, 미친 놈 같으니!”하고 욕을 하고 있다. 복신의 과격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br />
 
== 평가 ==
백제부흥군을 사실상 주도했으며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오래된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복신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 거꾸로 풍왕에 의해 죽었다는 《구당서》기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삼국사기》편찬 책임자이자 유학자인 [[김부식]]의, 충신과 역적에 대한 포폄을 분명히 밝힌다는 유교적 춘추대의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소홀히 취급한 그의 신라 중심적 사고방식이 혼재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는 훗날 단재 신채호에 의해 몹시 비판받았던 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고려, 조선 시대까지 복신은 용맹하고 지략을 갖춘 장수로서라기보다, 권력을 틀어쥔 채 왕을 업신여기며 독단을 행하다 결국 왕의 자리를 넘보고 그렇게 목숨을 잃은 역적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었다. 다만 드물게, [[남효온]]<ref> 《추강집》권제3, "鶴唳風聲奔北日/任存城主抗唐兵/曹蜍李志生猶死/福信雖亡擅美名"('부여회고' 제9)</ref>이나 [[정약용]]<ref>《다산시문집》권제2, "北部幾州懷福信/亂山無處覓扶豐."('부여회고' 中)</ref> 같은 문인들이 부여 지역을 돌아보고 지은 한시 작품에서 복신이 남긴 위업을 추모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반면 일본측 자료인 《니혼쇼키일본서기》는 복신을 가리켜, 많은 장수들 가운데 홀로 신묘한 꾀를 내어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시킨 인물로 몹시 떠받들고 있다. 나아가 복신의 죽음을 두고 백제가 '우수한 장수(良將)'를 잃은 것을 신라가 기회로 삼아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는 어투로 전개되고 있다.
 
== 관련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