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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립과 정봉수의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후금은 조선이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1627년]] [[음력 3월]]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하였다.
==정묘호란 당시 일본이 조선을 도와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던 이유==
===정묘호란 당시 일본이 조선을 도와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던 이유에 대한 개관===
 
===일본에서 군비축소가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에서 에도막부가 집권한 이후 군비축소가 이루어지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정난의 여파이다.
*군부 대신 문민이 집권하게 된다.
*일본 각 지방의 영주들의 세력억제를 통하여 정권 안정이 안정된다.
 
*기독교의 포교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때 조선에서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러한 군비축소 상황에서 에도 막부가 조선을 도와 지원군을 파병할수 없었다.
 
===조선의 일본에서의 지원군 파병에 대한 거부감이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워낙 당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하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은 굳이 일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이 후금군과 교전하게 되어 조선영토에 주둔하게 되는 거부감도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정묘호란 당시 일본에 지원군 파병 요청을 하지 않았다.
===후금군의 진군속도가 매우 빨랐다===
당시 후금군이 압록강 국경을 넘어 조선 영토에 진입한지 2주일만에 조선의 도읍 한양을 점령하여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하여 일본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할수도 없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