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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는 운암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연대하였다. 그 뒤 [[1938년]] [[5월]]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전위동맹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는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가게 된다. 망명생활 중 그는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8년]] [[10얼10월]] [[중국]]의 [[무한]](武漢)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전시복무단]]의 일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청년연합회' 조직에 참가한다.<ref name="tongilun267">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67페이지</ref>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ref>하다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충칭]]을 떠났다.
 
=== 혁명 활동과 조선독립동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