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은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번째 줄:
 
== 개요 ==
당 태종의 태자 [[당 고종|이치]](李治)가 [[수나라|수]](隋) 대흥성에 있었던 무루사(無漏寺, 정각사라고도)의 폐사된 자리에 [[정관]](貞觀) 22년([[648년]]) 모후인 [[문덕황후 (당나라)|문덕황후]](文德皇后) 장손씨의 명복을 위해 처음 절을 세웠다. 그 해는 문덕황후 사후 1기(紀)가 되는 해였다. 자은(慈恩)이라는 이름부터가 「자애로우신 어머님의 은혜」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각지에서 인재가 모여들며 그 규모는 더욱 커져, 자원(子院) 즉 탑두 10개 소를 포함해 건축물은 총수 1,897칸, 승려만 300명이 넘게 있었던 큰 절이었다. [[영휘]](永徽) 3년([[652년]])에는 [[대안탑]](大雁塔)이 건립되었는데, 현장 법사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이나 경전을 수장하기 위한 탑이었다.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귀국한 현장은 자은사의대자은사의 상좌로상좌(上座)로 있으면서, 절 북서쪽에 지어진 번경원에서번경원(飜經院)에서 불교 경전의 한역 사업에 힘썼고, 당 고종 [[현경]](顯慶) 3년([[658년]])까지 11년에 걸쳐 40여 부의 경전이 한역되었다. 이 한역 사업에는 현장의 제자인 규기와[[규기]](窺基)와, 신라에서 온 유학승 원측도[[원측]](圓測)도 참여하였다. 규기는 스승 현장으로부터 법상종을[[법상종]](法相宗)을 전수받아 포교하며, 절의 이름을 따 자은대사(慈恩大師)로 불렸다.
 
대자은사는 [[모란]]의 명소로써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것을 읊은 많은 한시가 알려져 있다. 당 중기 이후 대자은사 경내는 일종의 유원지처럼 변했다. 봄에는 사찰 소유의 남쪽 통선방(通善坊)에 있던 행원(杏園)의 살구꽃이, 여름에는 절의 남쪽 연못에 있던 연꽃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잎이 장안의 주요 볼거리였다고 한다.
앞서 영휘 3년([[652년]])에 [[대안탑]](大雁塔)이 건립되었는데, 이 탑은 처음에는 현장이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이나 경전을 수장하기 위한 탑이었다.
 
대자은사는 [[모란]]의 명소로써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것을 읊은 많은 한시가 알려져 있다. 당 무종 회창 5년([[845년]])의 [[회창의 폐불]] 때에는 대천복사, 서명사, 대장엄사와 함께 폐사를 면했다.
 
[[명나라|명]](明) 가정(嘉靖) 29년([[1550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자은사가 건립되었다. 절 안의 종루에는 철제 범종 한 구가 걸려 있는데 가정 27년([1548년]])에 주조한 것으로 무게 3만 근에 위에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관중팔경(關中八景)의 하나이다. 절 안의 모란정(牡丹亭)에는 70여 종에 달하는 모란이 심어져 있으며, 현장 법사의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