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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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 ===
아버지 목왕이 사망하여죽어서 왕위에 오른 직후, 아직 젊은 왕이었기 때문에, 공자(公子)의 한명인왕자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일단은 왕자 섭은 일단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지배하여 스스로 왕을 자칭했지만자칭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왕인 장왕을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왕자 섭은 [[진 (춘추, 晉희성)|진(晉)나라]]와 [[진 (춘추전국영성)|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는개시하려고 목적이었다.했으나 그런데 도중의도중에 노(盧)라고 하는라는 마을에서 섭은 살해당했다. 장왕은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
 
 
장왕은 즉위한 후 삼 년 동안 밤낮으로 놀기만 하고, 나라 전체에 영을 내렸다.
{{인용문2|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거든 죽여버리겠다.}}
어느 날 장왕은 왼쪽에 [[정 (춘추 전국)|정나라]] 여자를, 오른쪽에는 [[월 (춘추 전국)|월나라]] 여자를 껴안고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때 오거(伍擧)가 간하였다간언했다.
{{인용문2|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이 답하였다대답했다.
{{인용문2|삼 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삼 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수수께끼를 맞혔다.}}
여러 달이 지나고 장왕은 더욱 방탕해졌다. 이에 대부 소종(蘇從)이 간하니간언하니, 장왕이 말하였다말했다.
{{인용문2|내가 영을 내렸던 것을 듣지 못했는가?}}
소종이 대답했다.
{{인용문2|이 한 몸 죽어 임금을 깨우치는 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자 장왕은 놀이를 그만두고 정사를 살펴, 간신 수백 명을 주살하고 또 수백 명을 등용하였다. 또한 오거와 소종에게 정무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 문정경중 ===
국정을 정비한 장왕은 용(庸)나라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를 압박하고압박했고,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동주|주나라]]의 영토 근처에 땅에군사를 주둔하였다주둔시켰다. 주나라가 사자로 [[왕손만]](王孫滿)을 보내자 장왕은 그에게 [[구정 (중국)|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국(天子國)에천자의 나라에 대대로 전해지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데,가리키는 왕권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은연중은연 중에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장왕의 속내를 알아차린 왕손만은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하였고,대답했고 이에 장왕은 철군하였다.
 
=== 절영지연 ===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를 껴안았는데,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고 장왕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장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갓끈을 끊게 하였고, 장웅은 속으로 장왕에게 감사하였다감사를 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 (춘추 전국영성)|진]](秦)나라에게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러자 장왕이 장웅에게 "물었다.
{{인용문2|과인은 너를 그렇게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라고}}
장웅은 묻자 장웅은당시 연회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여 자신이 그때 총희를 껴안은 자임을 말하였다말했다. 너그럽고 여자에게 휘돌리지 않는 훌륭한 군주로서의 장왕의 인격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 춘추의 패자 ===
장왕은 [[진 (춘추, 陳규성)|진]](陳)나라의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 (춘추 전국)|정]](鄭)나라를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기원전 597년]]에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과를무기를 멈추어 쓰기쓰고,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해유지하며,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것이니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의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 는없다는 이유에서였다.
 
=== 마지막 싸움 ===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 (춘추전국)|제(齊)나라제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 (춘추 전국)|송]](宋)나라를송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이전에 [[노 (춘추 전국)|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이5월에 되어도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공락하지함락하지 못하고못하여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 그는장왕은 사망하였다죽었다.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