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굉 (장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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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홍농태수(弘農太守)를 지냈는데, 임지에서 환관이 작위를 팔아먹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봉록이 2천 석에 이르는 자라도 모두 잡아들여 문초하였고, 수십 명을 처형하여 인근 군국에까지 위엄을 떨쳤다.
 
이후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전임하였다. 왕굉은 성품이 각박하여 사적인 편지는 쓰지 않았고, 호족들을 멀리하였다. 때문에 빈객들은 그를 '''왕독좌'''(王獨座)<ref>'혼자 앉는 왕씨' 라는 뜻.</ref>라고 불렀다.<ref>사승, 《후한서》<nowiki>[</nowiki>[[이방 (북송)|이방]](李昉),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54에 인용]</ref>
 
훗날 동생 왕윤이 사도가 되었고, 왕윤은 왕굉을 우부풍(右扶風)으로 전임시키는 한편 같은 군 사람 송익(宋翼)을 좌풍익(左馮翊)에 임명하였다. 훗날 [[이각 (후한)|이각]](李傕) 등이 [[장안]](長安)에 입성하였을 때 왕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왕굉과 송익을 두려워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ref na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