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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在野史學)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 향토사(鄕土史) 연구를 '''향토사학''' 또는 재야사학이라 했고, 지금도 그렇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1978년]] 국사교과서의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역사교과서 파동 (대한민국)#고대사 논란|논쟁]]에 대한 보도에서 ‘이른바’ 또는 ‘세칭(世稱)’과 함께 ‘재야사학’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대학에 소속되지 않았거나 학회에 가입하지 않은 학자들을 ‘재야(在野)’라 불렀다고 설명하였다.<ref>이것이 韓國古代史다 (1) 說話와 正史 혼동말아야, 《경향신문》, 1978.11.7.</ref><ref>民族史의 在照明, 《경향신문》, 1979.1.9.</ref> 이후로 사학계의 일반적인 [[역사]]의 연구 방법과 절차를 달리하여 학계에서 위서(僞書)로 인식하거나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중심으로 신빙성이 낮다고 보는 사서들을 연구하며 고대 [[한국]]의 영토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을 '재야사학가' 또는 ‘재야연구가’, 이들의 역사 연구를 ‘재야사학’이라 부르고 있다. 재야사학, 재야사학자라고 호칭되지만, 제도권 사학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방법론으로 연구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학문'''이 아니며 '''학자'''도 아닌 비전문가의 독자연구이다.
 
== 주요 연구 내용과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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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단사학 ==
재야사학에서는 기존의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대개 [[역사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학계를 중심으로 [[대학]] 등에서 강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야사학자들은그러나 주류강단사학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을호칭은 일제공식적으로 [[식민사학]]의사용되지 후예라 비판해왔고않으며, 강단사학자들은재야사학 재야사학자들을측에서 실증은일방적으로 없고부르는 주장만 난무하는 비전문가들이라 비판해왔다호칭이다. 현재는 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은받았으나 재야사학과 같은 주장을 하는 소수의 역사학자들도 있으며, 이들도 재야사학자라 재야사학자도불리거나 배출되고자칭하기도 있다한다.
 
== 상호 비판 ==
반면, 재야사학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대사 서술과 같이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역사적 사실을 재단(裁斷)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극우]]에 친화성을 띠는 재야사학자'라는 표현<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3》, 1994.</ref>이나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는 비평<ref>강돈구, 〈새로운 신화 만들기-재야사학에 대한 또 다른 이해〉, 《정신문화연구》 제78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998년.</ref>이 나오고 있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을 [[일제 강점기]]의 이론이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아 [[단군]]을 [[신화]]로 매도하고 [[동이]], [[배달겨레]],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재야사학이 《[[규원사화]]》나 [[20세기]]에 쓰여진 위서(僞書)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무시하고, 지명의 유사성과 같은 단편적인 일치를 확대 해석하고 논리를 비약하여 [[한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증거라고 내민다고 비판하고 있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계의 이런 비판에 대해, 강단사학이 [[낙랑군]]의 치소(治所)를 [[왕검성]]으로 비정하는 것이나 [[한사군]]의 [[현도군]] 초기 치소 위치를 비정하는 방법 등이야말로 단편적인 일치의 확대 해석이자 지명의 유사성에 기초한 논리 비약이라고 공박하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016938|제목=“동해가 아니라 한국해, 동해 대응전략 바꿔야” 재미사학자 폴김박사|언어=한국어|이름=유세진 기자|작성일자=2011-08-11|출판사=뉴시스|확인일자=2012-01-03}}</ref><ref>최진섭, 《희망에 반하여 희망하라》, 1999년; 임지현, 《이념의 속살(억압과 해방의 경계에서)》, 2001년, 220쪽.</ref> 일각에서는 ‘재야사학’과 ‘강단사학’의 호칭을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반감이나 비판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ref>[http://news.donga.com/3//20070615/8454473/1 ‘다시 보는 한국역사’ 연재 마친 신용하 석좌교수], 《동아일보》, 2009-09-27</ref>
 
반면 재야사학의 주장도 학문적 검토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ref>[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060922091310852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 《오마이뉴스》, 2006.9.22.</ref>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한국]] 주류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이 [[일제]] [[식민사관]]과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라고 주장한다. 노론의 후예들이 [[일제]]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으며, [[광복]] 뒤에도 사학계 주류가 되어 명(明)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친일]], 친미(親美)로 이어져 왔다는 게 주장의 요지이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75033.html|제목=식민사학 ‘만리장성’ 요동 밖으로 물렀거라|언어=한국어|이름=한승동 기자|작성일자=2009-09-04|출판사=한겨레신문|확인일자=2012-01-03}}</ref>
 
반면, 재야사학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대사 서술과 같이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역사적 사실을 재단(裁斷)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극우]]에 친화성을 띠는 재야사학자'라는 표현<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3》, 1994.</ref>이나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는 비평<ref>강돈구, 〈새로운 신화 만들기-재야사학에 대한 또 다른 이해〉, 《정신문화연구》 제78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998년.</ref>이 나오고 있다.
 
== 평가 ==
재야사학은 강단사학과 상호보완하는 관계로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제시하는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재야사학자들의 주류 강단사학에 대한 비판은 한국 사학계가 기존의 도식적인 역사관을 답습하는 것에 경종을 울려,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인식해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고 요서(遼西)지역의 [[대릉하]] 일대를 고조선의 세력 범위로 인정하도록 하는 등 새롭고 진취적인 학설들이 제시되는 데에 기여했다.<ref>[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060922091310852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 《오마이뉴스》, 2006.9.22.</ref>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