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스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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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사건은사건'''은 1761년애 일어난 한 개신교인 청년의 자살과 가톨릭교도들의 부당한 모함으로 장 칼라스(Jean Calas)의 온 가족이 풍비박산난 사건을 말한다. 가톨릭교도들은 청년의 자살을 청년의칼라스의 가족들이 청년의 가톨릭 개종을 막기 위해 청년을 살해했다는 모함을 씌워 가족들을 재판에 회부해 [[거열형]]으로 처형시킨 사건이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이 사건을 적극 변호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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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툴르즈는 친가톨릭적 성향이 특히 강했는데, 그 예로 당시보다 200여년 전 약4000여명의 시민들이 이단으로 몰려 가톨릭 교도들에게 학살되었는데 이 날이 돌아오면 툴르즈인들은 성대한 축제를 벌일 정도였다. 사건 당일 칼라스의 아들은 자신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취업에 제한을 받는 등 삶을 비탄하여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그 광경을 본 몇몇 가톨릭 교도들이 칼라스와 그 가족이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고무된 시의 관료들이 칼라스와 가족들을 투옥시키고 가장인 칼라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을 집행했다.<ref>김우영《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 무신론자 배제론과 세속적 국가 종교론을 중심으로》(서강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ref>
칼라스의 처형에 찬성한 판사들은 이 허약한 노인은 [[거열형]]의 고통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형틀에 묶이면 자신의 죄와 공모자들의 죄를 자백할 것이라며 나머지 판사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판사들은 칼라스의 형을 집행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인은 바퀴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결백함의 증인으로 삼았으며 또한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원했다. 볼테르는 이 처형을 보며 이런 명언을 남겼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그 후 이 사건은 칼라스의 미망인을 만난 파리의 변호사들과 지식인들을 비롯한 여론에 의해 부당함이 성토되었고 [[볼테르]]는 수많은 팸플릿을 써서 칼라스의 가족을 변호하며 양식있는 사람들의 정의감을 일깨웠다. 파리 고등법원의 변호사인 보몽이 가장 먼저 칼라스 부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볼테르]]의 노력으로 칼라스 사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마침내 대법원은 여론에 밀려 마침내 재심 판결이 내려지고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됐다. 1765년 5월9일 칼라스가 처형된지 3년째 되던 날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됐다.<ref>최효찬《하이퍼 리얼 쇼크,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위즈덤하우스,P355)</ref>
 
==사건의 영향==
이 사건 과정에서 볼테르는 칼라스의 가족들을 변호하고 종교적 불관용의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했고 그 결과 유명한 《관용론》 쓰게탄생하게 된다.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개입은 프랑스 지식인의 현실참여운동인 〈앙가주망〉의 시초로 평가된다.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