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스 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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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답변 ==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회의에는 카를 5세와 독일의 영주들 그리고 여러명의 추기경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극단적인 교황주의자, 공정한 심리를 촉구하던 루터 지지자들, 그리고 절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던 에라스무스 지지자들이 있었다. 에라스무스 지지자들은 루터가 공재설을 포기하고 화체설을 묵인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와 타협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절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의회는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인용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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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 회의 결과==
루터가 보름스 의회를 떠날 때, 약속대로 독일군이 그를 호위하여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많은 백성들이 찬양하였지만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살해 음모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4월 24일 병사들을 보내 루터를 은밀하게 아이제나흐 근처의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카를 5세는 루터의 단호한 입장에 충격을 받았다. 가톨릭 교도였던 황제는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5월 26일 '보름스 칙서'를 발표하면서 루터를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체제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아니었으므로 루터를 체포 할 수는 없었다.<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88~90)</ref>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