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만 (189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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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상전(上田)잠사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을 받았다. 상해(上海, 상하이) 전기회사에서 근무한 뒤부터 [[창춘 시|장춘]](長春, 창춘)에서 대륙상회를 경영했고 [[1923년]] [[3월 23일]] 장춘 조선인청년회 설립위원을 역임했다. [[1923년]] 10월부터 [[1924년]] [[3월 16일]]까지 장춘 조선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1928년]] [[3월 17일]] [[동아일보]] 장춘지국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4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장춘 조선인거류민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일본군 주둔과 자위단 조직을 주장했다.
 
[[1931년]] [[10월 20일]]부터 [[10월 21일]]까지 열린 전만조선인민회연합회(全滿朝鮮人民會聯合會) 창립대회에서 장춘 대표 의원으로 참석했으며 [[1933년]] 6월 만몽일보사 창립위원을 역임했다. 1933년 8월 《만몽일보》 주필을 역임했고 [[1934년]]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다. [[1935년]] 6월 만몽일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6년]] 《만몽일보》 편집장을 지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까지 [[만주국 협화회]] 수도계림분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조선인에게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자각을 강조하고 협화 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일본의 재만 조선인 통제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9월 조선인교육후원회 신경(新京, 신징) 지역 상무위원으로 임명된 뒤부터 일본의 황민화 교육 정책 시행에 적극 협력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해외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