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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언'''(張偃, ? ~ [[기원전 173년]])은 [[중국]] [[전한]]의 제후왕으로, 노왕(魯王)을 지냈다. [[고황후]]가 세운 이성제후왕으로, 고황후 사후 여씨가 몰락하면서 왕위를 잃었으나 홀로 죽음을 면했다.
 
할아버지는 조경왕 [[장이]]며, 아버지는 선평무후 [[장오]]고 어머니는 [[노원공주]]다. 아버지가 죽자 그 작위를 이었고, 외할머니 [[고황후]]가 [[전한 혜제|혜제]] 사후 [[임조칭제]]하면서 고황후 1년(기원전 187년)에 새로 만들어진 노나라를 받아 고황후가 세운 첫 제후왕이이성제후왕이 되었다.<ref 당시name="s9">사마천: 《사기》 권9 여태후본기제9{{위키문헌|:zh:史記/卷009|사기 권9 여태후본기제9}}</ref><ref>위와 같음, 권17 한흥이래제후왕연표제5{{위키문헌|:zh:史記/卷017|사기 권17 한흥이래제후왕연표제5}}</ref><ref>반고: 《한서》 권13 이성제후왕연표제1{{위키문헌|:zh:漢書/卷013|한서 권13 이성제후왕연표제1}}</ref> 고황후 7년(기원전 181년), 아버지가 죽자 노왕이 됐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형인이복형 장치와 장수의장수가 후작이 되었고 이들의 보좌를 받았다.<ref name="s9"/><ref name="h32">위와 같음, 권32 장이진여전제2</ref><ref name="s89">사마천, 전게서, 권89 장이진여열전제29{{위키문헌|:zh:史記/卷089|사기 권89 장이진여열전제29}}</ref><ref>한서 장이진여전에서는 이 부분에서 “고후 원년, 노원태후가 죽었다. 후6년에 선평후 장오가 죽었다. 여태후가 장오의 아들 장언을 노왕으로 세웠다.”라고 해 장언이 장오 사후에 노왕이 된 것으로 나온다. 사기 여태후본기에서는 앞서 고황후 첫째 7년에 장언이 왕이 됐다고 하고 또 장오가 죽자 장언이 왕이 됐다고 나온다. 사기 장이진여열전은 “장오가 고후 6년에 죽었다. 아들 장언이 노왕이 됐다.”라 한다. 장치와 장수가 후작에 봉해진 것은 모두 장오가 죽었을 때의 일로 나온다.</ref>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었을 무렵에는 어려서 봉국으로 가지 못하고 장안에 있었다. [[주발]] · [[진평]] 등 조정 내 반 여씨파 대신들과 [[유양 (제애왕)|제애왕]] · [[유장 (성양경왕)|성양경왕]] 등 고제의 서장자 [[유비 (제도혜왕)|제도혜왕]]의 아들들이 손을 잡고 여씨를 타도하면서 노왕 장언 등 고황후가 세운 제후왕들도 몰락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때 다른 제후왕들은 모두 전 황제 [[전한 소제 (4대)|소제]]와 함께 주살되었으나 장언만은 죽지 않았고, 노나라 왕에서 쫓겨나 남궁후(南宮侯)에 봉해졌다.<ref name="s9"/><ref name="s89"/><ref name="h32"/>
 
자기 전기에서도 왕에서 쫓겨난 후 남궁후에 봉해졌다 하고, 사기의 고조공신후자연표에서는 남궁후에 봉해졌다 하나, 한서의 고혜고후문공신표에서는 '도로 후작에 봉해졌다'라고 할 뿐이고 한서 백관공경표에 자손 장구가 선평후로 나와 간접적으로 선평후에 봉해진 것으로 나온다. 문제 15년(기원전 176년)에 죽었다.<ref name="s18">위와 같음,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6</ref><ref>반고, 전게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제4</ref>
 
== 주석 ==
<references/>
{{전임후임
|전임자=(첫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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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0년]]
|대수=1
}}
{{전임후임
|전임자=아버지 [[장오]]
|후임자=장구 혹은 장생
|직책=[[전한]]의 선평후 혹은 남궁후
|임기=기원전 180년 ~ 기원전 176년
|대수=2
}}
[[분류:전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