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삼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
{{중국사}}
'''위'''(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시대 (중국)|삼국]] 중 하나였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위'''(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시대 (중국)|삼국]] 중 하나였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 역사 ==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6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5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 (후한)|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후한)|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후한 헌제|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 (후한)|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후한)|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후한 헌제|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 (후한)|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조비]]는 수도를 다시 허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여, 낙양을 발전시키는 데 힘쓴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버지 조조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며, 부하·장수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허물이 없게 하였다. 그런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한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조위)|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위진남북조)|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수도를 다시 허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여, 낙양을 발전시키는 데 힘쓴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버지 조조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며, 부하·장수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허물이 없게 하였다. 그런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한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조위)|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위진남북조)|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 역대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