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코묘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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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간에이]](寬永) 10년([[1633년]]) 3월 12일에 태어났다. 19년([[1642년]]) 태자로9월 책봉되어2일에 저군(儲君, [[태자]])로 책봉되었고, 12월 15일에 친왕선하를 받았다. 이들해인 간에이 20년([[1643년]]) 10월 3일에 11세의 나이로 [[메이쇼 천황]](明正天皇)의 양위를 받아 천황위에즉위, 이듬해 21일에 즉위식이 올랐다거행되었다.
 
그의 재위는 [[에도 막부]]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에서 [[도쿠가와 이에쓰나|이에쓰나]](家綱)의 치세와 겹치며, 도후쿠인(東福院) 도쿠가와 가즈코(德川和子)가 천황의 양모였기에 쇼군 도쿠가와 집안과는 형식적으로나마 외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황은 반막부적 태도가 강한 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조오 (1652년)|조오]] 3년([[1654년]]), [[천연두]]로 인해 22세에 사망.
 
천황은격렬한 무예를성격에 좋아하고검술을 격렬한좋아했던 성격을 가진 군주였으며한편으로, 반막부적 태도가 강한 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한편으로천황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유학]](儒学)이나 한학(漢学)을 존중하였다. 처음에는 명경가(明経家)로 알려진 후시하라 가타타다(伏原賢忠)로부터 《[[주역]]》(周易)을 배웠고, 뒤에 [[성리학]]에 경도되어 니조 야스미치(二条康道)의 추천으로 민간에서 불려온 아사야마 쇼신(朝山素心)에게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게이안]](慶安) 4년([[1651년]]) 9월에는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공적을 칭송하며 그의 문집에 몸소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한때 승려였고 유학자로 이름이 높긴 했지만 일개 서민에 불과한 후지와라 세이카의 글에 천황이 몸소 서문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 전까지 유례가 없었던,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한시문(漢詩文) 짓기도 좋아해 한시집 《봉제집》(鳳啼集)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경학에 대한 경도에 비해 [[와카]](和歌)나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같은 일본의 고전은 유약하다며 깔보았다고 하는데(관련 일화 후술), 재위 중에는 조정의 의례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뜻을 강하게 비치며 [[쇼호]](正保) 3년([[1646년]])에 [[이세 신궁]]에 폐백 바치는 의식을 부활시켰다. 유교적 의식인 석전(釈奠)이나 궁중의 대학료(大学寮)를 다시 일으켰고, 복제(服制) 개혁에도 뜻을 보였다고 전하나, 모두 천황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재위 12년 만인 [[조오 (1652년)|조오]](承應) 3년([[1654년]]) 9월 20일, [[천연두]]로 인해 천황은 22세로 사망하였다. 다음 달 15일에 '''고코묘인'''('''後光明院''')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평소 보였던 반막부적 태도나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막부에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ref>에도 중기의 유학자 무로 규소(室鳩巣)의 《규소소세쓰》(鳩巣小説)에, 천황의 병이 악화되자 간토(関東)에서 의사를 보내며 약을 권했고 천황은 거부했으나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도이 도시카쓰|도이 오이노카미]](土井大炊頭, 도이 오이노카미 도시카쓰)가 극구 권하자 하는 수 없이 막부에서 온 의사가 권한 약을 복용하였고, 이에 '''병세가 급변했다고급변했다'''고 적고 있다. 글 속에 독살을 명기한 것을 아니나 다분히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기사는 죠토쿠(正徳) 5년([[1715년]]) 5월 6일자 규소의 편지에서 나온 것이라 해서 천황 사망 60년은 지난 뒤의 것이고, 고코묘 천황 사망 당시 교토 슈고다이는 도이 오이노카미 즉 도이 오이노카미 도시카쓰가도시카쓰(土井利勝)가 아닌 이타쿠라 시게무네(板倉重宗)였다. 도시카쓰는 고코묘 천황이 즉위하던 해에 이미 사망했고 뒤를 이은 도시타카(利隆)도 교토 쇼시다이를 맡은 적이 없으며(도이 집안에서 교토 쇼시다이가 나온 것은 고코묘 천황 사후인 18세기 도이 도시사토土井利里 뿐이다) 실제 막부는 천황의 병세 악화를 알고 의사 다케다 도안(武田道安)을 상경시켰지만, 도안이 출발하기 전날 고코묘 천황은 이미 숨진 뒤였다.</ref> 이미 사망 전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던 고코묘 천황은 막내동생 아테노미야({{lang|ja|高貴宮}}, 훗날의 [[레이겐 천황]])가 태어나자마자 만일에 대비해 그를 양자로 삼을 뜻을 보였고, 고토노 나이시(勾当内侍)를 통해 막부에서 파견되어 있던 긴리즈키(禁裏付) 다카키 모리히사(高木守久)와 상담하자 다카키는 쇼군(이에쓰나)께서는 "천황께서 잘 알아서 하실 일"이라며 막부에 칙사를 보내는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회답했다고, 구게 나카미카도 노부즈미(中御門宣順)의 일기 《센슌공기》(宣順公記)에 남아 있다. <ref>《센슌공기》 죠오(承応) 3년 10월 17일조.</ref> 또한 아테노미야의 생모는 고코묘 천황 자신의 생모의 사촌 누이로, 당시 일본에서 고코묘 천황의 계승자가 될 만한 직계 황족은 대부분 궁가(宮家)를 이어받거나 출가해 절에 들어가버려, 유일하게 장래가 정해지지 않은 남자 황족이었던 아테노미야를 고코묘 천황이 양자로 들여 황위를 잇게 하는 것은 당시로써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 타당한 선택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