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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순양(順陽, 지금의 [[허난 성]] [[시촨 현|시촨]]淅川) 출신이며, 범엽은 산음(山陰, 지금의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 시|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사족(士族) 집안으로 선대 범귀(范晷)가 [[서진]](西晋)의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지낸 이래, 증조할아버지 범왕(范汪)은 [[동진]](東晋)의 안북장군(安北將軍)・서연이주자사(徐兗二州刺史)・무흥현후(武興県侯), 할아버지 범녕(范寧)은 임회(臨淮)・예장(豫章) 등지의 태수(太守)였으며, 아버지 범태(范泰)는 송의 시중(侍中)・광록대부(光禄大夫)를 지내며 사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추증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범엽 자신은 첩의 소생으로 서자(庶子)였으며 범엽의 어머니는 그를 측간에서 낳았다. 범엽이 태어날 때 그의 이마가 벽돌에 맞아 상처가 나는 바람에 벽돌을 뜻하는 「전(磚)」이 범엽의 소자(小字)가 되었다고 한다.
범엽의 증조할아버지 범왕은「사물을 두루 알고 바르게 기억하여 도리에 통달하였다」는 칭송을 받으며 《상서대사(尙書大事)》(20권)・《범동양방(範東陽方)》(105권) 등을 저술했고, 범녕도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12권)을, 범태도 《고금선언(古今善言)》(24권)을 저술한 당대의 명사였다. 범엽 자신도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경사(經史)를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뿐 아니라 음률(音律)에도 통달하였다.
420년에
당시 의강은 [[유송 문제|문제]](文帝)의 아우로서 재상이 되어 내외 정무를 맡아보았는데, 그 권세가 황제인 문제조차 능가하는 것이었다. [[440년]]에 문제는 의강의 심복이던 유담(劉湛) 이하 열 명 가량을 주살하거나 유배하고 의강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좌천시켰는데, [[445년]]에 산기시랑(散騎侍郎) 공희선(孔熙先)이 몰래 의강의 복권과 옹립을 꾀하였으나 11월에 단양윤(丹陽尹) 서담지(徐湛之)의 고발로 공희선의 계획이 발각되고, 범엽도 모의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자신을 포함한 일가 전원이 처형당하고 말았다. 향년 48세였다.<ref>처음에 공희선이 범엽에게도 함께 가담할 것을 권유했을 때 범엽은 공희선을 가볍게 보고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이 바뀌어 공희선 등의 모의에 동참했다고 한다.</ref>
== 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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