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다 노리히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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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프로 입단 전 ===
나라 현립 사쿠라이 상업고등학교 시절에는 4번 타자로서 활약해 고교 통산 4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고마다의 타격 연습을 앞두고 타구에 주의하라는 교내 방송이 나올 정도로 비거리가 굉장했다고 하였는데 그 지역에서는 ‘나라의 [[찰리 매뉴엘|매뉴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는데 당시는 투수 신분이었지만 타자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이후 타자로 전향했다.
 
이듬해 1981년부터 2년 동안 2군에서 뛰다가 1983년 4월 10일 1군 데뷔전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경기를 앞두고 연습 도중 부상당한 [[나카하타 기요시]]를 대신해 7번·1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첫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때려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후지타 모토시]] 감독은 당초 베테랑이었던 [[야마모토 고지 (1951년)|야마모토 고지]]를 기용할려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의 제안으로 선발이 정해졌다고 한다. 상대 투수는 [[미기타 가즈히코]]였다. 등번호 '''50'''의 고마다, 등번호 55의 [[요시무라 사다아키]], 등번호 54의 [[마키하라 히로미]] 등 3명을 통틀어 ‘50번 트리오’ 라는 애칭이 붙여지는 등 요미우리의 젊은 선수로서 세간의 주목받았다. 그 해 마키하라는 시즌 12승을 올린 활약으로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센트럴 리그 신인왕]], 요시무라는 규정 타석에 채우지는 못했지만 3할 2푼 6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고마다도 요시무라와 마찬가지로 규정 타석에 채우지는 못하면서도 시즌 12홈런을 기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역할을 했다.
 
1984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로부터 ‘한발타법’({{lang|ja|一本足打法}})을 추천받아 수도권에서 경기가 있는 어떤 날에는 매일 같이 오 사다하루의 스승인 [[아라카와 히로시]]의 자택에 드나들며 한발타법의 습득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 그 후 1985년부터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부임한 [[마쓰바라 마코토]]의 지도에 의해 자신의 타격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외야수와 1루수로 같이 활동하면서 주전 멤버들의 부상 이탈로 자리를 메우는 등 출전 기회가 늘어났다.
 
1987년 시즌 후반에 [[마쓰모토 다다시]]로부터 외야의 포지션 자리를 차지했고 이듬해 1988년에는 등번호를 '''10'''번으로 변경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다.<ref>1987년 8월 9일 [[나고야 구장]]에서 1군에 첫 등판하여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고졸 신인이자 좌완 투수인 [[곤도 신이치]]가 선발 등판했던 [[주니치 드래건스]]전이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와의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1번 타자로 기용되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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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시즌 도중 나카하타 기요시의 부상과 거기에 따른 [[오카자키 가오루]]가 3루수로 변경된 것에 의해 1루수의 빈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전 1루수로 활약하는 등 그 해에는 처음으로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9년 일본 시리즈|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 선발 투수였던 [[가토 데쓰로]]로부터 선제 홈런을 날리면서 주루 도중에 3루 베이스 부근에서 “바~카!!!” 라고 외쳤다고 한다. 요미우리는 3차전에서 가토-[[무라타 다쓰미]]-[[요시이 마사토]]의 계투진 앞에서 완봉되었지만 승리투수가 된 가토가 경기 직후 “요미우리는 롯데보다 약하다”라는 취지의 발언한 적도 있어 이 “바~카!!!” 라는 발언은 일반적으로 “가토의 폭언에 대한 매도”라고 인식되었다.<ref>그러나 고마다는 실제로 가토의 발언 자체에 화가 나있던 것은 아니고 장외 홈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그 일타에서 승리를 확신했다는 등에 흥분한 상태에서 “바~카야로~!!!” 라고 외쳤지만 “‘바~카’라는 곳만 강렬하게 입을 크게 열어 말한 것이니까 그것이 텔레비전에 비쳐서”, “가토 본인도 아마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들렸었던 것은 [[가네무라 요시아키]] 정도였다”라고 후에 이렇게 말했다.</ref> 팀은 3연패를 당하다가 이후 4연승을 기록하면서 자신도 MVP로 선정되었다.
 
1990년에는 시즌 22홈런과 83타점을 팀내에서 최다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1991년에는 개인 최고 성적인 3할 1푼 4리의 타율을 남기는 등 부동의 주축 타자로서 맹활약을 했다.
 
1992년, [[아킬레스건]] 통증에 시달린 [[하라 다쓰노리]]가 1루로 변경된 것에 의해 [[우익수]]로 전향했는데 수비 범위는 좁았지만 강한 어깨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전반기에는 홈런을 양산했지만, 타점 부문에서도 거의 동률을 이룰 정도로 계속 기록하는 등 그 해에는 개인 최다인 27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전반기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하라를 대신해 4번 타자로서 29경기에 출전했다. 시즌 종료 후 하라, [[사이토 마사키]]와 함께 일본인으로서는 연봉 1억 엔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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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
요코하마 이적 첫 해인 1994년 시즌 개막 초에는 3번 타자를 맡았는데 초반에 타격 호조를 보였지만 성적이 점점 떨어지면서 주로 6번 타자로서 출전, 병살타도 29개를 기록했다. 1995년에는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까지 모두 출전하면서 홈런은 불과 2개였지만 시즌을 통해서 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6년 5월과 6월에는 타격 호조를 이루면서 요코하마 이적 후 처음으로 타율 3할 대의 달성이 기대되었지만 그 후에는 타격 감각이 떨어졌다. 최종전에서는 3개의 안타를 날리면서 맹추격을 하였지만 결국 2할 9푼 9리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시즌을 끌냈다. 8월 22일의 요미우리전에서 [[고노 히로후미]]로부터 만루 홈런을 때려내 센트럴 리그 전체 구단으로부터 만루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전년도 홈런 갯수가 6개에 불과할 정도로 체력 저하가 우려될만한 상황에 직면했지만 2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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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