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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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은 의를 숭상하는 청렴한 인물에서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격하되었다.<ref name="nodae201">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1페이지</ref> 이후 조선 왕조 내내 정인홍은 대역 죄인 취급을 받았다.<ref name="nodae201"/>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1864년]] 늦가을에 [[합천군]] 군북면에 있던 정인홍의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가야산 해인사입구 각사 탑동(各寺 塔洞)으로 이장하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정인홍의 시신은 입고 있던 수의도 썩지 않고, 머리칼, 피부도 살아생전 그대로이며 어깨와 목은 피 자국이 은은하게 그대로였다 한다.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627)에 개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한제국 고종|고종]] 즉위 전까지 출사길이 막혔으며, 제자이자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을 지지한 것에 반발한 동계 [[정온]]의 학맥 일부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종 때 가서야 그의 후손들과 북인 계열 유생들이 복권 상소를 올렸다. 1863년(고종 원년) 12월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이 사색타파(四色打破)를 선언하자 정인홍의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노론]]계열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864년]] 다시 정인홍의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8년]](대한제국 융희 2년)에 가서야 그해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ref>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ref>, [[좌의정]]의 직위가 내려졌다. 조선[[대한제국]] 멸망 후 1911년에 문집이 재간행되었다.
 
=== 현대 ===
[[대한제국 순종|순종황제]] 때 복권되었으나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이르러 진정한 복권, 평가가 나타났다.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되었다.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1931년]]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밝혔다.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며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한국의 역사]] 역사상의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1959년]] [[대한민국]] [[문교부]]장관 [[최규남]]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1983년]]에 그의 문집 [[내암집]]의 한글 영인본이 상하 2권으로 발간되었으며, [[1997년]] [[12월]]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정인홍 관련 고문서 및 서적, 교지 등 131점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0, 331, 33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