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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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884년 4월에 포르니에르(Fo.E.Fournier)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5개조로 된 '청-프 간명조약'을 체결하였다. <ref name="신승하"/> {{Rp|337~339}} 1884년 6월에는 [[갑신조약]]([[제2차 후에조약]], [[파트노트르 조약]])이 체결되어 응우옌 왕조는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는 통감을 베트남에 두기로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간명조약 체결 이후 철군 명령을 전해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 하]]를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북려충돌'이라 부른다. 이 때 청조에서는 주전파 [[장지동]]을 다시 양광총독으로 임명하고 [[진보침]]과 [[장패륜]]을 광동과 복건에 보내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베트남에 있는 [[유영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프랑스도 대대적인 중국 침략계획을 수립하고 해군에게 [[대만타이완]] 섬의 기륭을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복곤]]의 마미(馬尾)를 공격하여 [[청나라]]의 [[복건 함대]]를 패퇴시켰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끼엔푹]] 황제는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사망(1884년 7월 31일)하고, [[끼엔푹]] 황제의 남동생인 [[함응이]] 황제가 즉위(8월 2일)했다. <ref> 이와 같이 [[뜨득]] 황제 사망 1년도 안되어 4명의 황제가 즉위하는 이상사태로 응우옌 왕조 내부의 혼란은 끊일 날이 없었다.</ref> 프랑스의 공격에 대해 청은 지금까지의 타협정책을 버리고 [[8월 6일]]에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우선 육로로 군대를 신속하게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연해의 해군에 대하여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육로의 작전은 주로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과 베트남의 영토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1884년 2월에 변경의 요지인 [[진남관]]이 함락되었다가 [[풍자재]]가 이끄는 군대의 공세로 겨우 수복하였다. 해로의 경우 전세가 중국에게 유리하지 못하였으나 프랑스에게도 결코 유리한 편은 아니었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이때 [[영국]],[[미국]],[[독일 제국|독일]] 등이 조정에 나섰는데,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인 하트를 이용하였다. 하트는 영국정부로부터 위임을 받고 중국해관의 영국 런던사무처의 캄벨(James Dunean Campbell)을 1885년 4월에 [[프랑스]] [[파리 시]]로 파견하여 '청-프 간명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 아래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그리하여 [[청불 전쟁]]은 끝났으며, 1885년 6월에 [[이홍장]]과 프랑스 공사인 파트노트르(Jules Patenotre) 사이에 [[톈진]]에서 "청-프 신약" (혹은 [[톈진 조약 (프랑스)|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청나라는 응우옌 왕조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 두 곳의 통상 장소를 정하기로 하는 한편,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9~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