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파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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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익주]]의 염두(廉頭)와 고증(姑繒)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장리(長吏)를 죽였다. 또 장가(牂柯) · 담지(談指) 등 24개 현이 이에 동조하니, 그 인원이 3만여 명이었다. 여벽호는 촉군(蜀郡)을 떠나 건위(犍爲)에서 만여 명을 모아 장가를 쳐서 크게 물리쳤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기원전 83]]), 고증 · 섭유(葉榆)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여벽호는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시원 6년([[기원전 81년|기원전 81]]), [[운중군|운중]][[태수]](雲中太守)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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