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십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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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099jerusalem.jpg
|설명=십자군의 예루살렘 공격 ([[1099년]])
|날짜=[[1096년]] - [[1099년]]
|장소=[[근동]], [[아나톨리아]], [[레반트]]
|결과=십자군의 승리 <br /> [[십자군 국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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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mnenos-Isaac-Arms.svg|15px|border]] [[비잔티움 제국]]<br />
[[파일:Armoiries Héthoumides.svg|15px]] [[실리시아 왕국]]<br />
|교전국2='''[[사라센|이슬람 왕국]]'''<br />{{국기그림|터키|셀주크}} [[셀주크 투르크]] <br /> [[파일:Flag of Jihad.svg|22px|border]] [[다니슈멘드]]<br /> {{국기그림|이집트|파티마}} [[파티마 왕조]]<br /> {{국기그림|모로코|1147}} [[알모라비드 왕조]]<br /> {{국기그림|아프가니스탄|1880}} [[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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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은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이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에 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ref name="서문역">E. M. 번즈, R. 러너, S. 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 상》, 박상익 옮김, 소나무, 2007, p. 405</ref>
 
당시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툴루즈의 레몽 4세|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쟁쟁한 군웅들을 앞세우고, 총사령관으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데마르]] 주교가 있었고 [[은자 피에르]]도 따라갔다.
 
제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먼저 [[니케아 전투|니케아]]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 전투|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는 가장 존재감 없고 중립적인 [[고드프루아]]가 되었으나, 얼마 못되어 죽었다. [[보에몽]]은 [[아데마르]]의 후임인 [[다임베르트]]와 짜고 예루살렘을 노렸으나 다임베르트는 일찌감치 온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에게 밀려나고, [[보에몽]]은 무슬림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며 공식적으로 끝이난다.
 
=== 사죄 ===
제1차 십자군 출정으로부터 900여년뒤인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는 그리스에 방문하여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약탈과 살인 방화 등의 만행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출처|날짜=2013-4-9}}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