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 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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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왕이 자결한 해 8월에 후히토의 딸인 [[고묘 황후|고묘시]](光明子)가 쇼무 천황의 황후가 되었고, 후히토의 아들 4형제(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 모두 의정관과 요직을 두루 차지하였다. 그러나 고묘시 소생의 모토이 왕(基王)은 진키 5년(728년) 태어난지 불과 1년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고, 대신 후지와라 씨가 아닌 아가타 이누카이노 히로토지(懸犬養廣刀自)가 아사카 친왕(安積親王)을 낳는다. 정치적으로 천황과 아사카 친왕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경우 천황의 숙모이기도 한 기비 내친왕 소생의 왕자(즉 나가야 왕의 아들)인 가시와데 왕(膳夫王) 등의 왕자들이 덴무계 남자 황족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을 가장 유력한 계승자였으며, 이것은 나가야 왕이 제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후지와라 씨의 고묘시가 황후가 되고 후지와라 씨 4형제에 의해 수립된 후지와라 정권은 덴표 9년([[737년]])에 후지와라 씨 4형제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크게 흔들렸고, 나가야 왕을 자결로 몰아간 것에 대한 저주라는 소문이 돌면서 동시에 나가야 왕을 추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덴표 10년([[738년]]) 7월 10일에는 좌병고(左兵庫)의 오토모노 고무시(大伴子蟲)가 우병고(右兵庫)의 수장이 된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와 바둑을 두다 나가야 왕을 논하던 가운데 알력이 생겨 그만 그를 참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즈마히토는 일찌기일찍이 나가야 왕을 밀고한 공으로 외종5위하 관위를 받은 자였다. 해당 사건을 기록한 《[[속일본기]]》(続日本紀)에서 나가야 왕을 고발한 아즈마히토의 행동을 「무고」(誣告)라는 단어로 적고 있는 것에서 《속일본기》 편찬 당시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초기 일본의 조정은 나가야 왕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일화 ==
* 나가야 왕이 왕의 부모와 쇼무 천황 이전 역대 천황을 위해 발원하고 와도 5년([[712년]])과 진키 5년([[728년]]) 5월 두 번에 걸쳐 사경한 《대반야경》(大般若經) 1부(6백 권)는 《나가야 왕 원경》(《진키경》)의 일부로써 남아 전한다.
* [[779년]] 완성된 《도다이와조토세이덴》(唐大和尙東征傳)에는, 당의 승려 감진(鑑眞)이 일본의 유학승 에이에이(英叡), 후쇼(普照)에게 "일찌기일찍이 일본국의 나가야 왕께서 불법을 숭상하시어, 당의 승려를 위해 1천 장의 가사를 기증하셨다"고 말했다는 기술이 있다. 그 가사 가운데 한 벌에는 가장자리에 "산천과 지역이 달라도 풍월천은 같고, 여러 불자를 맞아 함께 내연을 맺는다"는 글귀를 수놓았다고 한다.
* 반면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중권1에는, 쇼무 천황이 대법회를 열었을 때 태정대신 정2위 나가야 왕이 신분 천한 사미승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민중에게 전파된 불교 설화에서 나가야 왕의 불교를 귀족 불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빗댄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