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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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정보 |
소재_국가=[[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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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의
[[한양도성]]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사랑하기도 했다. 여인들이 숙정문을 자주 찾았고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 이름 유래 ==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url=http://www.outdo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63
|제목=<nowiki>한양도성 창의문~혜화문</no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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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4-06-19
|확인일자=2014-12-01
== 역사 ==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ref>《태조실록》 태조 10권 5년 9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509024_002&tabid=k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ref> [[1413년]]([[조선 태종|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ref>《태종실록》 25권 13년 6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1306019_002&tabid=k 서전문(西箭門)을 열다]</ref>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ref>《연산군일기》 54권 10년 7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ja_11007025_006&tabid=k 숙청문을 막고 새 문을 만들게 하다]</ref>,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165, ISBN 9788958720966</ref>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0200209127007&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9-0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275&publishType=00010 자하문 26년만에 일반공개], 《동아일보》, 1993.09.02.</ref>,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8861 ’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쿠키뉴스》, 2006.03.19.</ref>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0210020920702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0-21&officeId=00020&pageNo=7&printNo=16939&publishType=00020 삼청지구성곽·숙정문복원], 《동아일보》, 1976.10.21.</ref>,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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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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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주
<references group="주" />
; 참조주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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