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글 수정, 내용 보강 |
||
27번째 줄:
|웹사이트 =
}}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다. 속칭은 '''동대문'''(東大門)으로,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ref group="주">《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ref>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과 [[1869년]]([[대한제국 고종|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지금은 [[종로구]] 관할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 역사 ==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ref>《태조실록》 태조 10권 5년 9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aa_10509024_002&tabid=k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ref>,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조선 문종|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ref>《문종실록》 6권 1년 3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ea_10103017_009&tabid=k 당령 선군과 방패·섭육십을 징용하여 도성을 수축하다]</ref>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ref>《문종실록》 10권 1년 10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ea_10110001_004&tabid=k 좌의정 황보인에게 흥인문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ref>,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ref>《단종실록》 6권 1년 5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fa_10105005_001&tabid=k 이명민을 불러서 창덕궁·인정전과 흥인문·수문의 역사를 끝마치게 하다]</ref>
[[1724년]]([[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ref>《영조실록》 2권 즉위년 1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0011025_003&tabid=k 국장 도감에서 발인 습의 때 대여의 높이에 부족한 흥인문을 고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르라]</ref> [[1868년]]([[조선 고종|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ref>《고종실록》 5권 5년 9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0509007_001&tabid=k 중추부 등 아문을 중건하고 성문을 수리하도록 하다]</ref>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ref>《고종실록》 6권 6년 3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0603016_001&tabid=k 흥인문 공사가 끝났으나 물길이 막혀 따로 수문 한 곳을 뚫다]</ref>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 (철학)|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서울전차|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ref>《고종실록》 48권 44년 3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4403030_001&tabid=k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ref>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ref>▼
== 건축적 특징 ==▼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ref>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지금은 [[종로구]] 관할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 특징 ==
== 현지 안내문 ==
줄 55 ⟶ 45:
== 갤러리 ==
{{위키공용분류|Heunginjimun}}▼
<gallery>
File:Heunginjimun Gate, Seoul, South Korea.jpg
줄 63 ⟶ 54:
== 각주 ==
; 내용주
▲{{위키공용분류|Heunginjimun}}
<references group="주" />
; 참조주
<referen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