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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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ref>《영조실록》 2권 즉위년 1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0011025_003&tabid=k 국장 도감에서 발인 습의 때 대여의 높이에 부족한 흥인문을 고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르라]</ref> [[1868년]]([[조선 고종|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ref>​《고종실록》 5권 5년 9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0509007_001&tabid=k 중추부 등 아문을 중건하고 성문을 수리하도록 하다]</ref>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ref>《고종실록》 6권 6년 3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0603016_001&tabid=k 흥인문 공사가 끝났으나 물길이 막혀 따로 수문 한 곳을 뚫다]</ref>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 (철학)|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서울전차|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ref>《고종실록》 48권 ​44년44년 3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4403030_001&tabid=k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ref>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숭례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31196 “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2003.09.02.</ref>
 
== 건축적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