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광릉여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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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소제 (8대)|소제]]가 즉위하고서 1만 3천 호를, [[원봉]] 중에 입조하고 1만 호를 더 받았으며 2천만 전과 황금 2천 근, 안거와 사마, 보검도 받았다. [[전한 선제|선제]]가 즉위하고서는 네 아들이 열후에 봉해졌고 작은아들 [[유홍 (고밀애왕)|유홍]]은 고밀왕에 봉해졌다.<ref name="h63"/>
 
소제가 젊고 아들이 없자 왕이 되기를 바라 [[무당]] 이녀수(李女須)를 불러와 저주를 행하게 했고, 이녀수가 [[전한 무제|무제]]의 혼이 강림했다면서 유서가 장차 천자가 되리라고 해 후하게 사례하고 무산에 제사를 드렸다. 마침 소제가 죽었고, [[전한 폐제|창읍왕]] 유하가 황제가 되자 무당을 시켜 저주했다. 유하가 얼마 못 가 폐위되자 이녀수 등을 더욱 신임했다. 그러나 다음 황제가 여태자의 손자인 [[전한 선제|선제]]로 정해지자 선제를 세운 명분에 반발해 이녀수에게 계속 저주를 하게 했다. 또 초왕 [[유연수]]의 처남을 사위로 삼아 유연수에게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주도록 지지를 받아냈다. 나중에 유연수가 이 일이 적발돼 자결하고 초나라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연루되었음이 밝혀젔으나밝혀졌으나, 불문에 붙여지고 황금 5천 근과 기물들을 받았다. 광릉여왕은 후한 선물을 받은 데다 선제가 맏아들 [[전한 원제|유석]]을 태자로 정하자 황제가 되기를 포기하고 저주를 그만두게 했다.<ref name="h63"/>
 
아들 남리후 유보가 살인을 저지르고 작위를 뺏겨 광릉나라로 돌아왔는데, 광릉여왕의 희첩 좌수(左修)와 간통하자 기시했다. 광릉상 승지(勝之)<ref>성은 미상.</ref>가 광릉왕의 사피(射陂)<ref>사양현에 있는 사수(射水)의 제방.</ref>의 밭을 뺏어 빈민들에게 주기를 청해 승인을 받자, 광릉여왕은 중단한 저주를 계속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저주하고 있던 것이 발각돼, 조정에서 조사에 나서자 입을 막기 위해 무당과 궁인 20여 명을 죽였다. 공경들은 광릉여왕을 죽이기를 청했고, 정위와 대홍려가 신문하러 광릉나라를 찾아왔다. 광릉여왕은 사죄하고 이들을 돌려보낸 후, 궁에서 태자 패·딸 근자·호생 등과 밤새 술을 마시며 총애하는 팔자(八子)<ref>전한 궁녀의 직급.</ref> 곽소군(郭昭君)·가인자 조좌군(趙左君) 등에게 노래와 반주를 맡기고 슬픔에 찬 노래를 부르니 좌우의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이후 아침이 돼 모임을 파하고 태자 패에게 자신을 장사지내지 못하게 당부한 뒤, 목을 매 자살했다. 곽소군과 조좌군도 자살했다. 선제는 은혜를 베풀어 유서의 아들들을 사면해 서인으로 만들고, 유서에게 '[[여 (시호)|여]]'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원전 54년, 재위 64년 만에 죽었다. 광릉나라는 폐지돼 광릉군이 됐고, 7년 후에 태자 패를 왕으로 삼아 부활했다.<ref name="h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