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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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 개원 3년([[715년]]) 6월에 산동(山東)에 누리 피해가 발생하자 백관들은 누리 피해를 하늘의 재앙이라며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했지만, 요숭은 누리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적극적인 누리 살포 계획을 추진, 들에 불을 놓거나 파묻거나 하는 방식으로 성과를 거두었고, 전국에서 잡아들인 누리는 9백만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 요숭은 [[장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후 장열이 자신의 자손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한 요숭은 자손들에게, 자신의 영전에 옥으로 만든 기물을 갖다두었다가 장열이 문상을 하러 와서 거기에 눈독을 들이면 옥으로 만든 기물을 주면서 요숭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면 큰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장열이 만약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면 곧장 장안을 떠나 지방으로 가서 숨어 살 것을 명했다. 원래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장열은 요숭의 영전에 놓인 그 옥으로 만든 기물에 눈독을 들였고, 요숭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기물을 바치면서 장열에게 요숭의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장열은 그 말대로 요숭의 비문을 지어주었고, 이후 집권한 장열은 이미 죽은 요숭을 칭송하는 온갖 미사여구로 된 비문을 장열 자신의 손으로 지었고 그 내용이 세상에 널리 퍼진 마당에 요숭의 자손에게 해를 끼쳐봤자 결국 자신에게 그 욕이 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내 요숭의 자손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한다.<ref>마수취안(馬樹全) 저(차혜정 역) 《착점 - 인생의 한 수 어디에 둘 것인가》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281~282쪽.</ref>
* 《신당서》 노회신전에는, 어느 날 요숭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황문감(黄門監) 노회신(盧懐慎)이 정무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요숭에 비해 재결도 늦고 업무 처리도 깔끔하지 못해, 중요한 업무가 지체되는 일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노회신을 요숭보다 능력도 처지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대신이라며 비웃었던,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고 한다(단 반식재상이라는 야유에 대해 노회신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